안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
십계명 강해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네 번째 계명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하기 위해 쉽니까? 아니면 쉬기 위해 일하십니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나,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이나 그 질문이 그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하기 위해 쉬는 것과 쉬기 위해 일하는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라는 질문에 어떤 선택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일하기 위해 쉬느냐? 쉬기 위해 일하느냐? 라는 질문에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을 사는 방식은 물론이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단순한 삶의 방식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과도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영적 문제입니다.
먼저 일하기 위해 쉰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쉬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하기 위해 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쉬는 것은 다음 날 직장이나 일터에 나가 다시 일할 힘을 충전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런 사람에게 쉬는 것이란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나 소파에 누워있는 것을, 쉬는 것이라 여깁니다. 마치 방전된 전기차나 휴대전화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 충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쉬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쉬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쉬는 것을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지도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 열심히 땀 흘려 일합니다. 수고한 열매를 통해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기에 필요 이상으로 일하여 몸을 혹사하거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일하기 위해 쉬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잘 쉬기 위해 일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명이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안식일은 두 개의 중요한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에서는 안식일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이날이 단순한 휴식을 넘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며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은 안식일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이제 막 가나안 땅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하루도 편히 안식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평생 노예로 일 만하며 살아야 했던 이들을 구원하여 저들에게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은 한 마디로 저들이 빼앗긴 안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일해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 저들과 언약을 맺는 데 그 언약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출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표징(증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1:13a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다시 말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표징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던 일을 멈출 수 있습니까? 일을 멈추는 것은 먹고 사는 것이 내가 하는 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데리고 있는 종들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종들에게도 일을 시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거주하는 나그네는 물론 키우는 짐승들에게도 일을 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은혜가 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처럼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두 가지 기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건에서 비롯되었든지 아니면 출애굽 사건에서 비롯되었든지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쉬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생존경쟁과 노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의 고통과 수고를 생각할 때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쉼을 누리는 안식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입니다.
물론 기독교인 우리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비록 지키는 요일은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안식의 은혜는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냈던 것처럼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영성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있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의 핵심 원리, 즉 '일의 멈춤'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생토록 일만 하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일한 것을 누리고 즐기며 살아가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임이나 게으름과는 다릅니다.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의도적인 선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일에는 일을 멈추고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하며 성도들과 교제하므로 영적인 재충전과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즐기거나 건전한 취미활동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웃을 위한 작은 봉사나 섬김이 우리 영혼에 더 큰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단, 이것이 또 다른 '일'의 부담이나 의무감으로 변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고 영혼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해야 할 일’의 연속입니다. 잠을 자면서도 일 걱정에 시달리고, 일어나도 개운치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 없음'의 상태입니다. 안식(安息)이라는 말은 편안할 ‘안(安)’자와 숨 쉴 ‘식(息)’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숨 가쁘게 달려오던 삶의 호흡을 가다듬고 편안하게 숨 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기들이 자는 모습을 보면 참 평화롭죠?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마치 온 생애의 피로를 다 푼 것처럼 개운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합니다. 마치 창조의 아침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잠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피곤하고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한가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쁜 것이 좋은 것이다', '바빠야 유능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쁜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분주함이 마치 그 사람의 능력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것처럼 되어 버린 이상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평안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복 중 하나가 바로 이 '한가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가로움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정한 한가로움이란, 해야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상태, 일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 한가로움은 다른 이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다 보면,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며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분주함 속에서 효율성과 경쟁만을 추구하며 스펙 쌓기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우리 삶의 근원이시며 가장 소중한 분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 망각의 시대,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참된 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앞만 보고 쉬지 않고 달려가는 우리를 부르시어 잠시 멈추어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를 창조부터 예비하신 안식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살았던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되찾는 회복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바라기는 우리를 안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인간다운 삶, 존귀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일상의 분주함 속에 참된 쉼과 안식 그리고 평안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 다 내게로 와서 쉬라’는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듣고 주님이 주시는 안식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오늘 드린 예배를 통해 지금까지 바쁘게 지내며 사느라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되찾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안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여, 우리의 삶이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산 제물이 되기를 바라며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