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라는 계명
출애굽기 20:13 요한1서 4:21
십계명 강해 스물두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살인하지 말라”라는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한 연속설교를 마무리하는 설교로 “사람을 살리라는 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가장 결정적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창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따라서 살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넘어,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도전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 생명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을 죽이는 것도 살인이라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존재 가치 자체를 짓밟는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죽이는 존재론적 살인이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것처럼,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 차가운 차별의 시선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키는 보이지 않는 살인이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여섯 번째 계명은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금지선’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가야 할 ‘소명의 출발선’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될 때 자신도 살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하고, 미워하고, 결국 서로의 영혼에 상처를 입힐까요? 나의 이익, 나의 기준, 나의 생각, 나의 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자만과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기준이라는 자기중심성이 다른 사람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만과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은 존중해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여깁니다. 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여깁니다. 바로 여기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 자체로 보지 않고, 그의 조건과 행위로 판단하는 영혼의 살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살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반복적으로 그리고 우리 일상에서 무심코 일어나고 있는 존재론적 살인을 막을 수 있습니까?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자만과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게 합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는데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개가 이길까요? 주인이 먹이를 많이 준 개가 이긴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어떤 마음에 더 많은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사람을 살리려는 사랑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사탄의 마음입니까?
살인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살인의 씨앗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움과 분노, 시기와 차별, 무시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랑이 없는 차가운 땅에서만 자라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릴 때, 그곳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만약 사랑이 정말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저절로 좋아지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만약 사랑이 감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내 믿음이나 의지보다는 상대방의 외모나 태도 인격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됩니다.
우리 속담에 “주는 것 없이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속담처럼 사람이 싫은 데에는 이유 없이 그냥 밉고 싫은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반대로 주는 것 없이도 예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러 와도 미운 놈 있고, 받으러 와도 고운 놈 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아무런 노력이나 철저한 자기 성찰이 없이도 저절로 생겨나는 좋아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훈련 그리고 오래 참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기독교 신앙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랑은 상대방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믿음과 영성에 달린 문제입니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 그 어디에도 '상대방이 사랑스러울 때'라는 조건은 없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내 감정이 아닌, 나의 결단과 훈련에 달린 문제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장 삭개오를 손가락질하며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키가 작고 가난하여 사람들에게 늘 소외당하며 살았던 그 영혼의 감추어진 내면을 보시고 그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고 경멸하였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부정한 사람이라며 멀리했던 나병 환자까지도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저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고 이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기독교 사랑의 시작은 상대방은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람을 그의 소유, 학벌, 지위, 능력, 외모와 같은 '무엇-됨'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쉽게 무시하고 소외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 모든 조건을 넘어,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가 돈을 잘 벌어서가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있어 주어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의 잘못된 행동까지 동의하거나 묵인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우리는 그의 잘못에 함께 아파하며 그가 회복의 길로 돌아오도록 끝까지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방식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라면, 그 사랑의 완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사슬을 끊어내고, 상처 입은 하나님의 형상을 끌어안는 '용서'의 결단에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며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혔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사람을 인격이 아닌 소유물이나 도구로 여기던 이집트의 억압적인 문화에서 신음했던 고통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신 후 가장 먼저 주신 계명들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얼마나 쉽게 또 다른 가해자로 돌아설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억압의 고통은 분노의 씨앗이 되어, 폭력의 악순환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가해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내가 받은 상처를 다른 이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사랑은 미움의 사슬을 끊는 '용서'에 대한 결단입니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분노하며 원한을 품는 것은 내가 독약을 마시고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상하는 것은 내 영혼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미움이라는 감옥에서 나 자신을 해방하는 가장 능동적이고 용기 있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상처는 너무 깊어서 용서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용서는 단 한 번의 완벽한 행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이 필요한 힘겨운 과정입니다. 다만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며 자신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용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며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누구를 '살리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남편, 아내, 자녀를 '있음' 그 자체로 기뻐해 주십시오.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 저 사람을 용서할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의 첫걸음을 떼어 보시길 바랍니다. 바라기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능력을 통해, 미움과 원한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사람을 살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자만과 자기중심성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를 함부로 판단하고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던 죄를 회개합니다. 이제는 미움의 사슬을 끊고 용서를 선택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모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시어, 그들의 조건이 아닌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죽이는 자가 아닌 살리는 자로서, 이 땅에 생명의 길을 넓혀가는 도구로 저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라며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