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꺾어야 할 꽃인가, 돌보아야 할 정원인가?
출애굽기 20:14, 마태복음 5:27-28
십계명 강해 23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사람은 꺾어야 할 꽃인가, 돌보아야 할 정원인가?”라는 제목으로 “간음하지 말라”라는 7번째 계명에 대해 말씀을 전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어떤 분들에게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계명처럼 여겨지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지극히 사사로운 인간의 성생활까지 간섭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내 이야기는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지만, 남의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추악한 불륜으로 치부합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다른 이들의 죄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이중적인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앞에서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진실은 이 계명이 단순히 육체적 일탈을 넘어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왜곡된 욕망을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유대 사회는 간음을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유대 사회만 아니라 대부분 인류 문화는 간음을 매우 부도덕한 심각한 죄로 여깁니다. 한국도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간음을 매우 심각한 부도덕한 죄로 여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간음을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던 유대 사회도 간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인류 문화가 간음을 매우 부도덕한 죄라고 여기지만 인간의 삶에서 간음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 솔직한 우리 사회의 현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의 삶에서 간음이라는 심각한 죄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요?
살인에 관한 계명과 마찬가지로 간음에 관한 계명 역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또는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는 것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간음은 단순히 육체의 일탈이기 이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이라는 드러난 행위 이전에 보이지 않는 잘못된 마음에 문제 해결의 초점을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이라는 죄의 이면에는 “탐욕”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죄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순간, 이미 간음의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인격을 가진 소중한 존재로 존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의 필요를 채워줄 수단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중세 시대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인간의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중심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허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소유하고 이용하고 쟁취하려는 탐욕적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중심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얻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꺾어서' 자기 꽃병에 꽂아두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꽃이 그 자리에서 계속 아름답게 피어있도록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꺾어야 할 꽃으로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꿔야 할 정원으로 보고 있습니까?“
탐욕은 단지 성적 욕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배우자에게 “내 방식대로 해주어야 한다”라는 요구, 자녀를 하나님이 맡기신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내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결국 사랑을 파괴하고, 가족을 소유물처럼 대하게 만듭니다.
직장에서도 탐욕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나은 자리, 더 많은 연봉을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올라가려는 마음, 남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마음은 탐욕입니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료가 아니라 내가 이겨야만 하는 경쟁 상대로만 여긴다면, 이것 역시 탐욕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이 봉사를 맡아야 해”, “내 주장대로 해야 해”라는 마음은 겉으로는 섬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은 탐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 체면과 존재감을 세우려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것은 섬김의 이름을 빌린 탐욕입니다.
자기중심적 사랑은 연애 관계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람"이나 "내 욕망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상대가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게 되면 그 관계는 쉽게 깨지고 맙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독차지하려 물을 다 퍼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다 마르면 그는 또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SNS와 광고 속에서 끊임없이 자극받습니다. “더 아름답게, 더 성공적으로, 더 많이 가져라.”라는 메시지가 넘쳐납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화려한 사진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부러운 마음, 비교하는 마음, 그리고 나도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솟구칩니까! 이것이 바로 탐욕의 작동 방식입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아내와 후궁을 천 명이나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천 명이나 되는 여인을 거느리고도 만족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쾌락을 누리면 누릴수록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간음은 단순히 성욕을 참지 못한 저지르는 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공허해진 인간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공허와 결핍을 억지로 메우려는 잘못된 몸부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음욕을 품는 것”은 단순한 성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탐욕에 사로잡혀서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 형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만 보는 마음,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유하려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으로 이미 간음했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람을 요건, 배경, 외모, 재산만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 사람을 소유할 대상 또는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는 탐욕의 시선입니다. 의식적으로 사람을 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웃을 만나거나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보십시오. 이 작은 습관은 우리의 시선을 탐욕의 눈에서 사랑의 눈으로 바꾸어, 관계의 회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탐욕은 돈, 명예, 쾌락을 더 움켜쥐라고 속삭입니다. 이 거짓말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복을 세어보십시오. 건강한 몸, 사랑하는 가족, 따뜻한 밥 한 끼,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교우들 그리고 같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친구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를 외치던 탐욕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결혼 언약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바로 신실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자주 배신하고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를 일관되게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영적 간음으로 비유합니다. 대상5:25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으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누구와 언약을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깊은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돈, 명예, 쾌락, 인정—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마음으로, 영혼으로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성적인 쾌락을 제한하기 위해 7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7계명은 우리를 불필요한 성적 탐욕으로부터 해방하여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도록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의 공허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으로만 채워주소서.”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간음보다 더 깊은 죄인 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신부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혹시 지금 마음속 깊은 곳에 '더 가져야 행복하다'라는 탐욕의 속삭임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불안하다’라는 목마름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결코 탐욕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탐욕을 몰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사랑의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탐욕의 노예로 살 때는 늘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해서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받지 않아도 먼저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탐욕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과 진리의 하나님, 저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탐욕의 죄로부터 구원하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져,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이 이제 사람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탐욕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라며 우리를 탐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