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도둑입니까?
출애굽기 20:15, 빌립보서 4:11-13
십계명 강해 27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8계명을 가지고 “누가 도둑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나누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깨달음과 변화된 생각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무엇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짧은 계명 속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8계명 담긴 의미는 단순히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넘어 ‘사람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나의 이익과 만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도둑질입니다.
오늘은 “누가 도둑입니까?”라는 질문으로 8계명이 누구에게 주시는 계명이며 누구에게 해당하는 계명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도둑입니까? 과연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초대 교회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세운 위대한 신학자로 알려진 어거스틴은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경험을 고백합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이웃집 과수원에 들어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배를 훔쳤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그 배가 특별히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훔치는 행위 그 자체’가 주는 짜릿함 때문에 도둑질했다고 고백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을 통해 깊은 신학적 통찰을 얻습니다. 인간은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이미 도둑이 들어 있기에 누구라도 도둑질할 수 있으며, 우리 안에 이미 미움이 있기에 누구라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며, 우리 안에 이미 욕망이 불타오르기에 누구라도 간음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나는 살면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기에 8계명 앞에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실 때, 늘 외적인 행위를 넘어 그 동기가 되는 내면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히 무언가를 훔치는 행위만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속 '탐심'이야말로 모든 도둑질의 근원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내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하고, 심지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나의 존재를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탐심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도둑의 정체입니다. 따라서 8계명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탐심이라는 진짜 도둑을 직면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사람이 왜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며 이용하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의 시간과 재능과 감정을 훔쳐서라도 나의 이익을 채우려는 탐심 때문입니다. 결국, 직접적인 절도든 사람에 대한 교묘한 이용이든, 그 뿌리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를 넘어 남의 것을 탐하는 도둑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탐심은 속삭입니다. '더 높은 지위를 원해.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싶어.' 이 탐심의 목소리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동료를 나의 승진이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동료에 대해 뒷담화하거나 동료의 아이디어나 공로를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런 것이 탐심에 사로잡혀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심은 또 이렇게 유혹합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똑똑하고 성공한 자녀를 갖고 싶어.' 이 탐심에 눈이 멀면, 우리는 자녀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향유'의 마음을 잃고, 자녀를 자기의 성공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녀를 자기를 빛내기 위한 소유물로 여기는 것도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탐심들이 모여 사회 전체의 거대한 욕망이 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구조적 도둑질'에 가담하게 됩니다. 구조적 도둑질이란, 내가 직접 훔치지는 않았지만 불의한 사회 시스템을 통해 누군가의 몫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가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누리는 플라스틱의 편리함, 값싼 에너지와 풍족한 음식, 끝없는 개발을 향한 욕망은, 결국 우리 미래 세대와 가난한 이웃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몫을 우리가 빼앗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장 우리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심으로 다음 세대가 살아갈 터전을 미리 훔치는 심각한 도둑질입니다.
이처럼 도둑질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탐심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도둑, 탐심의 정체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과연 이 죄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정죄와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소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13절의 고백,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족은 우리의 결심이나 인내로 이루는 경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부어주시는 초월적인 능력입니다.
우리가 탐심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채워지지 않은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결핍은 도대체 어디에서 올까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족이나 만족이 아닙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이라는 결핍을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핍이 우리를 탐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저 역시 종종 남과 비교하는 마음에 빠집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동기나 후배 목사의 자랑 아닌 것 같은 교묘한 자랑을 보면 제 마음속에도 시기심과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페이스북을 닫고, 아침 묵상을 열심히 준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가장 중요한 일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이러면 신기하게도 비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는 저 자신을 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SNS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성공한 모습을 매일 같이 들여다봅니다. 그러면서 '나는 저것이 없구나' 하는 결핍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립니다. 바로 이 비교 의식이 우리 시대의 가장 교묘한 도둑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감사를 훔쳐 가고, 그 자리에 불평과 탐심을 채워 넣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족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이미 얼마나 '충만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발견하는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속삭이십니다. “너는 이미 내 사랑으로 충만하다. 내가 너와 함께하니, 더 이상 무엇을 탐할 필요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던 탐심의 목소리는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의 결핍'에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옮겨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족의 또 다른 비밀이 열립니다. 성경은 세상 만물과 모든 사람은 하나님 것임을 선포합니다.시편 24편 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자족하는 마음은 천하 만물과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에서만 나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유주가 아니라 그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과 재능, 물질을 사용하여 이웃을 섬기고,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경영에 동참하는 청지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청지기의 사명을 깨달을 때 비로소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나눔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라는 믿음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족을 훈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 되신다는 믿음의 기초 위에 자족을 훈련하고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영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를 분별하는 훈련을 통해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새 옷이나 최신 스마트 폰이 정말 필요한지, 아니면 그냥 갖고 싶은지 물어보세요. 옷장이 이미 가득한데 새 옷을 사려한다면, 잠시 멈추고 “이게 진짜 필요한가?” 자문해 보세요. 이것이 단지 더 갖고 싶은 욕심인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늘 물으며 살 때 우리는 자족을 훈련하고 배워갈 수 있습니다.
매일 감사 일기를 쓰는 것도 자족의 영성을 위한 매우 중요한 훈련이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면서도 티끌 같은 흠이 먼저 보이는 것이며 감사보다 불평불만이 앞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기쁨과 감사보다 늘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불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나 은혜를 구체적으로 적는 훈련은 마음의 불평불만과 비교하는 마음을 감사로 바꾸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이러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우리는 ‘있는 바를 족한 줄 아는’ 마음을 배우고, 내 안의 남의 것을 탐내는 도둑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도둑’이 살고 있음을 정직하게 마주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내면에 감추어진 탐심을 부추겨 이웃의 것을 탐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자족’하는 자유를 선택하시어 이미 주어진 것들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되고 존귀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 남의 것을 탐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심지어 다음 세대의 몫까지 도둑질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남을 것을 훔치고 빼앗는 자가 아니라 나누는 자로,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라며 우리를 탐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