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증거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출애굽기20:16 눅6:45
십계명 강해 서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9계명에 대한 두 번째 설교로 “거짓 증거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은혜와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의 준엄한 무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이 단순히 ‘거짓말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를 넘어, 이웃의 생명을 해하는 ‘살인’이요, 그의 명예와 재산을 빼앗는 ‘도둑질’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신뢰와 정의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죄악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처럼, 거짓 증인들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한 가문을 파괴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오늘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거짓 증언의 돌멩이가 법정이 아닌 가정과 직장, 심지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뒷담화’, ‘가짜뉴스’, ‘악성 댓글’, 그리고 상대를 비난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말의 형태로 얼마나 빈번하게 던져지고 있는지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파괴적인 죄악인 줄 알면서도, 거짓 증언의 유혹에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주 넘어지는 것일까요? 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게 느껴질까요? 우리의 마음 깊은 곳, 그 영적인 뿌리에는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거짓 증거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거짓 증거의 유혹에 빠지는 주된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아합왕의 탐욕, 즉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욕심이 사악한 아내 이세벨에 의해 불량배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만드는 끔찍한 죄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아홉 번째 계명인 거짓 증언의 죄는 다른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열 번째 계명인 탐심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이웃에 대해 거짓을 말합니까? 동료의 평판을 은근히 깎아내리는 뒷담화는 그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교묘한 말들은 나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려는 탐욕에서 나옵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아합의 탐심(10계명)은 이세벨의 거짓 증언(9계명)이라는 악한 도구를 통해 나봇을 죽이고(6계명)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8계명) 끔찍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증언은 종종 그 자체로 독립적인 죄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시작된 탐욕이라는 죄를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 내는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거짓은 마음의 탐욕이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순간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이기 위해, 나의 실수를 덮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동료를 깎아내리는 뒷담화의 이면에는 그를 밟고 올라서려는 욕심이 숨어있습니다. 자신의 성과를 부풀려 보고하는 말 속에는 더 많은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게 하는 또 다른 강력한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갔을 때 일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다웠기에, 이집트 왕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두려움이 진실을 말하는 대신 거짓을 말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도 예수님처럼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서 우리는 입을 닫거나 사실을 교묘히 비틉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보다 눈앞의 상황과 사람을 더 크게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실과 정직 대신 자기 보호라는 우상을 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욕심과 두려움을 넘어, 우리가 거짓 증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우리의 실존 그 자체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실패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자만이 진리 대신 거짓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한 말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은 단순히 사실을 왜곡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거짓 증언이었습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에 하나님 대신 뱀의 거짓 증언을 믿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 대신 거짓을 선택했다고 진단합니다.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인간은 스스로 속이고 세상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거짓의 온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실되게 살려고 결심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영적인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고치려는 노력 이상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짓말하지 않도록 노력하세요"라는 도덕적인 조언만 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즉 '정체성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썩은 사과가 열리는 나무에게 "좋은 사과를 열어봐!"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무 자체가 건강하게 바뀌어야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안에는 나도 모르게 자기를 합리화하고 유리하게 하도록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그대로 둔 채 우리의 힘만으로 노력하는 것은 곧 한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할까요? 이 변화는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진리'란 '사실'이나 '지식'을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진실한 인격체이신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삶의 방식을 이끌어 주실 가장 신뢰할 만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동행하기로 결심할 때,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거짓과 두려움에 묶여 살던 옛 모습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존재의 변화는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습성과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거짓의 말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을 바꾸길 원한다면 먼저 마음을 바꾸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말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습니까? 말은 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만들어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입이 수도꼭지라고 한다면 마음은 수원지와 같습니다. 수도꼭지를 바꾼다고 해서 물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수원지가 바뀌어야 물이 바뀌는 것입니다.
눅6:45 선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악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음에 있는 생각이 말이 되어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있는 생각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을 바꾸길 원한다면 마음을 바꾸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진리를 말하기 원한다면 마음에 선을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선한 것을 쌓지 않고 말만 바꾸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마음에 선한 것을 쌓을 수 있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은 선한 말 중에 가장 선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어디에 새기라고 합니까?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신6: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야 말이 바뀝니다.
사람이 말을 배우고, 말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말할 줄 아는 아이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엄마라는 말을, 아빠라는 말을 수만 번 이상 듣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라고 말하고 아빠라고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말은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듣는 게 먼저입니다. 그래서 선한 말 옳은 말을 듣고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를 말하려면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게 먼저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마음에 쌓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말을 바꿀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것을 마음에 쌓을 때 비로소 거짓 대신 정직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의 훈련은 반드시 혀의 훈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말하기 전에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1.이것이 꼭 해야 하는 말인가? 2. 이 말은 사실인가? 3. 이 말은 덕을 세우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 앞에서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큰 진실일 수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옮기지 않는 침묵, 불필요한 비판을 금하는 침묵은 이웃의 명예를 지키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침묵이 이웃을 향한 거짓된 비난이나 불의를 묵인하는 비겁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한 증인의 삶은 단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웃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공동체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복음의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용기 내어 진실을 말해야 하는 적극적인 책임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9계명은 단순히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증인이 되라”는 적극적인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욕심과 두려움에 이끌려 이웃에게 상처를 주었던 거짓된 말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합시다. 더 이상 우리의 말을 파괴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진실한 증인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일하고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법정에서도 침묵해야 할 때와 진리를 선포해야 할 때를 아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해서는 한없는 긍휼의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진리를 가리는 위선을 향해서는 단호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증언하심으로 가장 위대한 참된 증인이 되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든 말이 이웃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며, 마침내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참된 증인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곧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였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탐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는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말들로 이웃에게 상처 주고 공동체를 아프게 했던 우리의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제 우리의 입술의 수도꼭지를 고치기 이전에 먼저 마음의 수원지를 바꾸길 원합니다. 특별히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날마다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옵소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샘물이 되게 하사, 우리 입술이 열릴 때마다 생명을 살리고 서로를 세워주며, 주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