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에 숨어있는 우상숭배
출애굽기 20:17 골로새서 3:5
십계명 강해 서른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10번째 계명에 대한 첫 번째 설교로 “탐심에 숨어있는 우상숭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지금까지는 각계명마다 세 번에 걸쳐 설교했는데,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네 번에 걸쳐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삶, 변화된 삶에 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혹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친구들의 멋진 여행 사진, 새로 산 자동차, 자녀의 자랑스러운 소식들을 보면서 ‘부럽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 적 없으신가요? 특히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 속에서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고국에 있는 친구들이나 먼저 자리를 잡은 이들의 성공적인 모습을 볼 때, 부러움과 조급함으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소리 없이 벌어지는 은밀한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출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금하신 ‘탐내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단순히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마음까지도 죄라고 하시는 걸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탐낸다는 것은 그저 ‘좋아 보인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내 손에 넣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내 마음과 의지가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탐심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의 좋은 집, 좋은 차, 재능 있는 자녀를 보며 ‘참 좋다’, ‘부럽다’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단계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물건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죄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 부러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탐심이 싹을 피웁니다. ‘나도 저걸 꼭 가져야 하는데…’, ‘저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나를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며 신세 한탄에 빠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욕망을 넘어, 욕망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급하게 또는 강제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금지하신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됩니다. 이처럼 10계명은 우리 마음속에서 죄가 싹트고 자라나서 마침내 행동으로 나타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탐심을 금하는 열 번째 계명은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죄의 열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의 뿌리까지도 미워하신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잡초의 줄기만 자르는 것이 아니라 뿌리째 뽑아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정원을 망가뜨리는 탐심이라는 죄의 뿌리를 통째로 제거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열 번째 계명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있습니다.십계명 2계명부터 9계명까지는 모두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외적인 태도나 행동에 관한 계명입니다. 반면에 1계명과 열 번째 계명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생각에 대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시작인 1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명령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모셔야 한다는 마음에 대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10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마음의 탐심을 다스려야 한다는 마음에 대한 명령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 즉 마음을 보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에, 십계명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두 계명, 즉 1계명과 10계명은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계명과 10계명은, 마치 책꽂이 양 끝에서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북엔드(Bookend)’와 같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법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법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처벌합니다. 아무리 나쁜 생각을 했어도,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법정은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땅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법정에서는 일어난 사실, 드러난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겉으로 드러난 태도나 행동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사무엘상 16: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드러난 보이는 사실보다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열 번째 계명은 탐심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탐심의 영적인 정체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의사가 병의 원인을 진단하듯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바울은 단호하게 분명하게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탐심에 대해 우리가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바울은 왜 남의 것을 욕심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오직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셔야 할 우리 마음 중심에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가정과 자녀, 직업과 돈벌이, 성공과 인정, 체면과 사회적 지위가 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외모나 두뇌, 정치나 대의명분, 도덕과 가치관, 심지어 교회의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자기가 성취한, 세상에서의 부나 성공이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 주고 내 삶에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돈과 성공과 사람의 인정은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만족과 기쁨의 근원을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썩어져 사라질 세상의 피조물에서 찾으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열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1계명이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10계명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대신 다른 무언가를 올려놓으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고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이렇게 탐심이 우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탐심은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어머니’가 됩니다. 야고보서 1:15절 말씀이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짓는 모든 죄의 시작에는 항상 욕심, 남을 것을 탐내는 탐심이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이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전개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보는 순간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10계명). 그 탐심을 채우기 위해 그는 아내 이세벨과 공모하여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나봇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9계명). 결국 매수한 거짓 증인의 거짓 증언을 이용해 나봇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6계명). 그리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8계명).
이것은 아합왕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렸던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한가로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 목욕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그녀를 탐내었습니다. 그의 탐심은, 한순간의 쾌락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탐심이 간음(7계명)의 죄를 짓게 하고 그 간음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죄(6계명)로 이어지고 결국 우리아의 아내를 훔쳤습니다(8계명).
이처럼 모든 죄의 뿌리에는 언제나 ‘탐심’이라는 독초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탐욕은 반드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과 같은 실질적인 죄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하시며 드러난 행위보다 감춰진 마음에 대해 집중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히 ‘이것 하라, 저것 하지 마라’는 행동 강령에 대한 리스트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거룩한 부르심임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 그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탐심은 단순히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가벼운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는 우상숭배이며, 우리는 온갖 종류의 죄악으로 끌고 가는 대단히 위험하고 끈질긴 죄의 뿌리입니다.
열 번째 계명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성공에 대한 탐심, 자녀에 대한 탐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탐심, 더 편안해지고 싶은 탐심 등, 우리 안에 너무나 익숙해서 죄인 줄도 몰랐던 교묘한 우상들을 발견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를 절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탐심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만 올바른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주님 앞에 우리의 감춰진 마음을 정직하게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탐심의 뿌리를 보게 하시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우상들을 직면하게 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될 설교를 통해 우리는 이 탐심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길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이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탐심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는 존귀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탐심은 단순히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우상숭배였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탐심이라는 죄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습니다. 열 번째 계명 앞에서 우리 안의 감춰진 교묘한 우상들을 비춰주시고 이 문제의 심각성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탐심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이 아닌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면서도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임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