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침반은 어디를 가리킵니까?
출애굽기 20:17 누가복음 12:18-19
십계명 강해 서른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10번째 계명에 대한 두 번째 설교로 “당신의 나침반은 어디를 가리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삶, 변화된 삶에 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나침반과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나침반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나침반에 강력한 자석을 가까이에 가져다 대면, 바늘이 본래의 방향을 잃고 자석을 향해 돌아가 버립니다. 탐심은 나침반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자석과 같습니다. 그래서 탐심에 사로잡히면 우리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만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탐심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올려놓는 우상숭배입니다. 더 나아가 탐심은 십계명에서 금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와 같은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주 탐심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모두 죄인가요?”라는 의문을 가지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욕구(Needs)와 욕망(Desire)은 얼핏 대단히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건강한 '욕구'와, 우리 영혼의 나침반을 망가뜨리는 ‘욕망’을 분별하는 지혜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욕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생존과 행복을 위해 우리 안에 주신 몸과 마음의 필요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싶어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휘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은 마음까지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께서 주신 욕구입니다.
욕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한 그릇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만족을 느낍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됩니다. 욕구는 채울 수 있으며, 욕구를 채우면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모든 욕구가 즉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간절히 바라지만 아직 얻지 못한 분들도 계시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소망하지만, 여전히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욕구 자체는 채워지면 만족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은 ‘욕구’와는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게 합니다. 지금까지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그것 없이도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다시 바라보자,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와의 영적 나침반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욕망은 나의 절대적인 필요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나 자기 현실에 대한 불만족(하나님이 정말 모든 것을 먹게 하셨느냐?)을 통해 생겨납니다. 이처럼 욕망은 지금 가진 것보다 조금 ‘더’, 저 사람보다 조금 ‘더’를 외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더’의 대상이 내 이웃이 가진 것이 될 때, 그것이 바로 10번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탐심’이 됩니다.
인도에서 전해오는 우화입니다. 어느 마을에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금화가 가득 담긴 항아리 여섯 개와 금화가 반만 채워진 하나의 항아리를 발견합니다. 그는 순식간에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이지 항아리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모든 생각과 관심은 절반만 채워져 있는 마지막 일곱 번째 항아리에만 쏠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채우려고 해도 채우지 않은 일곱 번째 항아리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강력한 자석에 붙들려, 삶의 참된 방향을 잃어버린 인생의 비극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결핍감’입니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SNS)는 이러한 비교를 끝없이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의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순간만을 끊임없이 보게 되면서, 아무리 좋았던 것도 비교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만족했던 것들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바로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것이 욕구인지 욕망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자녀의 교육환경을 위한 정당한 욕구일까요, 아니면 남들과 비교하며 생겨난 욕망일까요? 자녀가 명문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자연스러운 소망일까요? 아니면 내 자랑거리를 만들려는 욕망일까요?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당연한 욕구가 죄의 본성을 만나 욕망으로 변질되는 순간입니다. 안전한 집에 살고 싶은 욕구가,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 저 사람보다 더 큰 집을 원하는 욕망이 되게 합니다. 내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욕구가, 내 자랑거리가 되길 바라는 탐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다음의 세 질문은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는 영적 잣대가 될 것입니다. 1.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는가? 2. 이것을 얻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가족,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3. 이것을 원하는 이유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풍성히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굶주린 무리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필요를 위해 날마다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침반의 방향, 즉 마음의 방향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다루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 형과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겉보기에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단순히 공정한 분배를 원하는 '욕구'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탐심’을 꿰뚫어 보시고, 그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농사가 너무 잘되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혼잣말로 계획을 세웁니다. 눅12:18-19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여러분, 이 부자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부지런히 일해서 부자가 된 것이 죄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부지런함을 칭찬합니다. 그의 진짜 문제는 그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철저하게 ‘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곳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 “내 영혼”. 그의 독백 어디에도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의 계획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나침반은 철저하게 ‘나’를 향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그는 재물이라는 엉뚱한 방향에서 영혼의 참된 만족과 평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의 안식과 기쁨을, 썩어져 사라질 ‘소유’에서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심의 본질이며, 1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 부요하라, 그렇지 않으면 부요함이 당신을 삼킬 것이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특별히 우리 이민자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공해야만 이민 온 보람이 있다”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성공한 이민자’에 두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 앞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탐심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신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단순히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 즉 가장 큰 욕망의 대상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나의 왕국’ 건설에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꿀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욕구)’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약속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방법과 때에 공급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방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곳간을 보며 “내 영혼아, 이제 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이것으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섬길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부자의 질문이 “어떻게 더 쌓을까?”였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의미 있게 흘려보낼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인가?' 질문하십시오. 직장을 선택할 때, 단지 연봉만이 아니라 '이 직장에서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자녀 교육에서도 '우리 아이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여러분의 나침반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만약 지금 우리의 나침반이 돈이나 성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고장 난 나침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의 나침반이 이웃의 집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내려놓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깨진 나침반을 고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셨습니다.
열 번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단순히 금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이웃의 소유와 비교하고 탐내는 불행한 삶에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존귀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바라기는 세상의 광고와 소셜 미디어의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나침반을 매일 재조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의 소원에 맞추어 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욕망을 좇는 삶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며 날마다 만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가운데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워지지 않아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게 하옵소서. 매일 아침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기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매일 저녁 이미 주신 복을 세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들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욕망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소망으로 채워주옵소서. 특별히 세상의 성공과 실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굳건히 붙잡게 하시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품위와 존귀함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면서도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임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