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십계명34-탐내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탐내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출애굽기 20:17 누가복음 10:25-37

 

십계명 강해 서른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라는 10번째 계명에 대한 세 번째 설교로 탐내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삶, 변화된 삶에 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두 주간 탐심에 대한 주제로 열 번째 계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설교에서는 탐심이 단순히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매우 위험한 우상숭배이며, 탐심에서 모든 죄가 시작된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 설교에서는 우리 영혼의 나침반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으나, 끝없는 욕망이 영혼의 나침반을 고장 내는 강력한 자석과 같음을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구(need)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채울 수 있고 채우면 만족합니다. 하지만 욕망(desire)’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끊임없이 를 외치게 하는 채울 수도 없고 만족할 수 없는 탐욕입니다.


오늘은 열 번째 계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다른 핵심 주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 번째 계명은 우리가 탐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웃입니다. 열 번째 계명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지난 두 주간 탐심이 무엇이냐를 다뤘다면, 오늘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십계명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은 단순히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웃의 소유와 비교하고 탐내는 불행한 삶에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존귀한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고 이웃의 필요를 채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선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옆집에 사는 다른 민족이 이웃입니까? 아니면 말이 통하고 정서를 나눌 수 있는 한국 사람입니까? 또는 매주 얼굴을 보며 함께 신앙생활 하는 우리 교회 교인들입니까? 혹시 우리 각자는 마음속으로 보이지 않는 이웃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웃은 누구까지입니까?


십계명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에 나오는 이웃은 출애굽한 동족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같은 혈통을 나누고, 같은 신앙을 가졌으며, 이집트에서 함께 구원받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로 자기들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신들로 가득한 고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동족이라는 울타리는 그 어떤 것보다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범위를 확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사는 이방인을 향해서도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레위기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도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과 서러움을 경험했으니, 너희 주변의 나그네를 이웃으로 품어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이민자로 사는 우리도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차이, 때로는 차별의 아픔도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우리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당한 아픔을 기억하는 자가 되어, 이 땅에서 소외된 또 다른 나그네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민 경험은 우리로 더 많은 민족과 인종을 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복음의 시대를 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웃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율법 교사는 정말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 교사의 속셈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자신의 율법 지식을 뽐내듯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대답이 옳으니, 이것을 행하며 살면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예수님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율법 교사의 교묘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너의 이웃은 이런 사람이다라며 이웃의 범위를 정해 주시는 대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유대인 한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겉옷을 뺏기고 죽도록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종교 지도자 제사장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모두 강도 만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모른 척 외면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저들은 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습니까?


물론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저들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져서 7일간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핑계로 사람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안전, 자신의 종교적 순결, 자신의 시간만을 탐한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탐심이 도움이 필요한 이웃마저 외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개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겨 평소에는 절대로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는 불쌍히 여겨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는 손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소중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치료하고, 근처 주막으로 데려가 밤새도록 돌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내어주며 돌볼 것을 부탁합니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더 갚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나침반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안전과 종교적 규례만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의 나침반은 이웃의 고통을 가리켰습니다. 탐심을 극복하는 길은 나침반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 나침반이 이웃의 필요를 가리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탐심을 극복하는 복음의 역설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내 이웃이 무엇입니까?” 물었던 율법 교사에게 되물으십니다.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만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이웃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은 결코 이웃이라 여길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서로 상종조차 안하는 원수 같은 관계였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네 개보다 못하게 여길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이웃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주변에 사랑을 베풀만한 사람이 없기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의 계명은 사랑을 베풀만한 이웃이 누구인지 찾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내 눈앞에 고통당하고 있는 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나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 민족, 종교, 국적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스스로 제한했던 이웃의 범위를 완전히 파괴합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의 계명은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민족과 국가는 물론이고 종교를 뛰어넘어 우리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행해져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허무신 담을 다시 쌓으려는 위험한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 대한 차별과 혐오와 적대감을 부추깁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속한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순수한 애국심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 손해를 끼쳐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민족적, 종교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을 허무는 원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깃발 아래 가두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매우 위험한 시도입니다. 그 어떤 국가주의도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구원과 평화를 위한 하나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몸소 허무신 담을 다시 쌓아 우리그들사이에 차별의 선을 긋는 불신앙입니다.


이런 유혹은 이민자로 사는 우리에게도 찾아옵니다. 우리 이민 교회는 낯선 땅에서 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그네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우리만의 안락한 울타리를 쌓고 그 안에 갇혀 버리라고 주신 경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울타리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십니다. 사도행전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휘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여기서 사마리아는 우리가 도저히 넘기 힘들어하는 장벽, 우리가 만나기조차 꺼리는 미워하는 대상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배경을 가진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 동료, 학교 친구, 가게 주인들,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경쟁자도 적대자도 원수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들은 모두 우리가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할 이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우리를 놀라운 역설로 초대합니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입니다. 이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탐심은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시키지만 사랑은 타인을 이웃으로 회복시킵니다.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줄 때', 우리는 탐심과 싸우는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됩니다.


이번 주 우리 앞에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낯설어도, 불편해도, 사마리아인처럼 그 앞에서 멈춰 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필요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을 대단하고 거창한 것으로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남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아주 사소한 친절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베푸는 친절과 사랑을 통해 우리를 탐심에서 해방하시고, 이웃 사랑의 기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허물어 주옵소서. '우리''그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시고, 모든 사람을 주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으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멈춰 서는 용기를 주옵소서. 내 것을 움켜쥐려는 탐심을 이기고, 이웃의 필요 앞에서 내 손을 여는 긍휼을 허락하옵소서. 이번 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옵소서. 누군가의 사마리아인이 되는 거룩한 경험을 통해 탐심을 이기는 이웃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오늘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과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으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면서도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임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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