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가 선을 넘어 올 때
마태복음 5:43-48
오늘부터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저러한 수많은 선을 그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어 놓은 선에 들어온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과 함께 지속되어온 인간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그어 놓은 선 밖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어 놓은 선을 뛰어넘어 선 밖의 예수님께로 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앞으로 계속될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의 첫 번째 설교로 “냄새가 선을 넘어 올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1. 보이지 않는 선: 영화 <기생충>이 던지는 질문
2020년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그리고 국제 영화상을 휩쓴 “기생충”이란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영화 속에서 박 사장 역할을 맡은 이선균 배우가 자신의 운전기사 기택에 대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김 기사 그 양반,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절대 넘지는 않아. 다 좋은데… 냄새가 선을 넘지."
영화에서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과 편견의 선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박 사장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코를 찌르는, 지워지지 않는 냄새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씻지 않아서 나는 악취가 아니었습니다. 영화는 그 냄새를 반지하 냄새,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 가난의 냄새라고 묘사합니다. 박사장에게 냄새는 “당신은 우리와 다른 부류야, 당신은 어디서 왔는지가 티가 나”라고 말하는 낙인과도 같았습니다.
냄새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본능적이며 아무 생각 없이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좋은 냄새에 미소를 짓고 나쁜 냄새가 나면 얼굴을 찡그립니다. 이처럼 냄새는 본능적인 인간의 반응이기에 사람들은 타인의 냄새를 혐오한다 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싫은 냄새를 싫다고 하는 것이니 누구도 여기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물론 싫은 냄새를 싫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냄새로 사람을 혐오하거나 차별하고 멸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냄새가 선을 넘어 올 때는 특별히 더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본능적 반응이 상대방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냄새 때문에 멸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의 수치심과 분노는 당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 영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독은 박 사장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숨겨진 모습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선 밖으로 밀어내야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선을 긋고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나랑 코드가 안 맞아. 저 사람에게는 특유의 냄새가 있어. 그것은 정치적 냄새일 수도, 계급의 냄새일 수도, 혹은 신앙의 색깔이 다른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2. 선 안의 삶과 혐오와 분노에 중독된 시대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선을 긋고 내가 그은 선 안에서만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정치나 신학에서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을 만나면 마음의 문을 닫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일 것입니다. 선을 긋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살면 세상 편합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어주고, 우리에게 확실한 소속감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과 다른 생각, 종교, 이데올로기 등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혐오와 분노를 쏟아내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왜 나와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까요? 화를 내면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라는 쾌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고 소리칠 때, 우리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낍니다. 분노는 때로 정의감처럼 보이지만, 쉽게 사람을 ‘악마’로 만들고 내 마음을 굳게 닫아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낮으로 분노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악마로 만듭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나와 신학적 입장이나 교리가 다르면,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심지어 예배드리는 방식이 다르면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를 위한 싸움'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3.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명령
세상은 선을 확실히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마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시 유대 사회는 선이 분명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은 이웃이었고, 이방인이나 세리, 로마의 압제자들은 원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빛의 아들들은 어둠의 아들들을 영원히 미워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는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선을 완전히 허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단순히 마음을 곱게 쓰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어 놓은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무너뜨리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당시 유대 사회를 송두리째 흔드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배타적 거룩함의 개념을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마5:4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하나님은 선을 긋고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주시지 않습니다. 악인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그어 놓은 선대로만 은혜를 베푸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4. 온전함의 진짜 의미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결론으로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온전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단어를 도덕적 완벽주의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인 텔레이오스의 의미는 성숙하다, 목적에 이르다, 완성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율법을 100점 만점으로 지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사랑의 품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배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해와 비를 악인에게까지 주시는 포용력, 선 안과 선 밖을 나누지 않고 품으시는 사랑의 너비,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완전함은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선을 긋지 말고 너희의 사랑을 성숙시키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고 이방인도 합니다. 성숙한 신앙, 온전한 신앙은 내 맘에 드는 사람뿐 아니라, 나와 다른 냄새가 나는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품어내는 것입니다.
5. 사랑과 경계, 그 사이의 지혜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학대를 참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 앞에서 침묵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악이라 부를 수 있어야 하고,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복수가 아닌 회복으로 선을 넘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말과 행동에는 단호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지만, 십자가에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을 향한 것입니다. 죄를 미워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존엄을 훼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악인이라는 낙인이 아니라, 이런 행동은 악이라고 말하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팀 켈러 목사는 관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관용은 신념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관용은 신념을 갖되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사람을 찌르는 무기로 삼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 부자와 빈자,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라는 이분법적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제3의 길'입니다.
6. 적용: 제3의 길, 은혜의 자리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냄새가 선을 넘었고 박사장 가족은 선을 넘은 냄새를 혐오하고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태도는 달라야 합니다. 냄새가 선을 넘으면 비극이 되지만, 사랑이 선을 넘으면 구원과 화해가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내가 그어놓은 선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편견이 없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는 모두 박 사장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선 밖으로 밀어내고 있습니까? 누구의 냄새를 혐오하고 있습니까? 나와 정치색이 다르다고, 신앙 스타일이 다르다고, 경제적 수준이 다르다고 마음으로 차단한 그 대상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우리의 죄 냄새가 진동할 때, 예수님이 먼저 하늘 보좌의 선을 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선을 그어 내편 네편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그어 놓은 선을 뛰어넘어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어 놓은 모든 선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뛰어넘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그어 놓고, 우리가 긋고 있는 선을 뛰어넘으려는 용기 있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마음만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선을 넘어 사랑할 때,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고,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선을 지키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거룩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여러분을 거룩한 도전으로 초대합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따뜻한 눈빛 하나, 말 한마디가 그 견고한 혐오의 선을 허무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축복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해와 비를 내려 주옵소서."
억지로라도 그렇게 입을 열어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있는 편견과 혐오의 선은 지워지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사랑이 그려질 것입니다. 세상은 냄새로 선을 긋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이 그어 놓은 선을 과감히 뛰어넘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냄새 나는 곳을 피해 늘 깨끗하고 안전한 선 안에 머물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선을 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의 그 온전하신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단순히 서로를 견디는 것을 넘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그어진 미움의 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허물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또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라며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