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로 사람을 때리지 말라
누가복음 6:27-36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두 번째 설교로 “진리로 사람을 때리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세상이 그어 놓고, 우리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의 말을 기억했습니다. '냄새가 선을 넘지.' 가난의 냄새, 계급의 냄새, 차별의 냄새. 우리는 그 냄새를 견디지 못해 선을 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을 넘어 세리와 죄인, 병든 자와 실패한 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 안에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 사랑이 중요하지. 그런데 사랑으로 다 품다 보면 진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교리는 어떻게 지키지? 이러다 우리 신앙이 다 흐려지는 것 아닌가?”라는 두려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나와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을 향해 분노와 혐오를 쏟아내는 이른바 분노에 중독된 시대입니다.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조롱하는 글을 보면, 마음 한편이 묘하게 시원해지는 그 감정에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안에서도 “동성애”, “페미니즈”, “진보와 보수” 같은 단어를 붙여 놓고, 그 이름 아래 사람들을 싸잡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고 내가 그어 놓은 선 밖의 사람을 미워하는 걸까요? 거기에는 이런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우리는 깨끗하고 너희는 더럽다”라는 마음이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 겸손으로 나타나지 않고, 우월감이나 두려움으로 변질되어 버릴 때,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1.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지키는 길’
성경은 진리를 무엇이라 가르칩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진리를 ‘옳고 그름을 가르는 정답지’나 ‘종이 위에 적힌 차가운 교리적 명제(Proposition)’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기독교 신앙의 진리는 살아 숨 쉬는 ‘인격(Person)’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진리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수호한다”라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분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진리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섬겨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지킨다’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혐오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핑계로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이 빠진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흉기일 뿐입니다. 간음한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진리로 위선자들을 꾸짖으셨지만,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며 사랑으로 율법의 그어놓은 선을 넘으셨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단호하셨지만, 죄인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이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라: 불가능한 명령 앞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들을 때 솔직히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 이건 너무하십니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원수는 나를 깊이 상처 준 사람입니다. 나를 이용하고 배신한 사람, 나의 신앙과 가치관을 조롱한 사람, 가족을 아프게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현실 감각이 없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원수를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도 원수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원수를 위해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행동하라고 하셨습니까? “선대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어도, 그 이름을 불러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 그 사람의 말을 한 번은 끝까지 들어주는 것, 비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어렵고 불편한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누가복음 6장 35-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혐오와 적개심으로 선을 그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자비로우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아픔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형제’로 보는 법
우리 교회 안에서도 교우마다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세대와 성격에 대해서도 서로 관점이 다릅니다. 어떤 성도는 “동성애는 절대 안 된다, 강하게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어떤 성도는 “그래도 사람은 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특정 정치인을 열렬히 지지하고, 어떤 분은 그 사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주 이렇게 합니다. “저 사람은 복음주의가 아니다”, “저분은 너무 진보다”, “저 장로님은 너무 꼰대다”, “저 젊은이는 너무 세상적이다.” 그렇게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라, 내 안의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로마서 14장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14:1-3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여기서 비판은 단순히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향해 “그래도 그도 주님의 사람이다. 그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다.”라는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자신이 볼 때 아직 미숙하고, 균형이 안 맞고, 심지어 위험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신학자들도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특히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당대 최고의 부흥사였던 조지 휫필드는 구원론을 두고 서로 격렬하게 논쟁했습니다. 웨슬리는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고, 칼빈이나 휫필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예정론을 둘러싼 이들의 논쟁은 대단히 격렬했습니다.
어느 날, 휫필드를 싫어하던 웨슬리의 열성적인 지지자인 한 여인이 웨슬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천국에서 조지 휫필드 씨를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신학이 다르니 그는 천국에 못 갈 것이라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웨슬리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부인. 우리는 천국에서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인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웨슬리는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고, 저와 부인은 보좌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특정한 교리나 교파 또는 주장에 독점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지기 전에, “이 사람도 결국 주님께 서게 될 사람이다”라는 믿음의 눈입니다. 그 눈이 열릴 때, 내 마음에서 혐오의 선, 적대의 선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4. 혐오는 왜 복음이 아닌가?
오늘날 교회는 성소수자, 타 종교, 혹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말할 때,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때로는 너무나 거친 두려움과 혐오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 혐오하고 정죄하면 잠깐은 시원합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우월감, “우리는 진리 편이다”라는 안도감을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하시고 엄격하셨지만, 죄인과 약자에게는 한없이 따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타협한 사건이 아닙니다. 죄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동시에, 죄인에게 열린 두 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혐오나 정죄는 무엇입니까? 혐오나 정죄는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나는 그들보다 낫다”, “나는 저런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고백 앞에 서는 사람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들과 똑같이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혐오의 언어는 기독교 신앙과 가장 먼 언어입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우리 교회가 걸어갈 길
이 시간 각자 마음에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또는 생활 방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 교회 안에서, “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고 느껴지는 그런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 안에 올라오는 감정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아뢰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저 사람이 싫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화가 납니다.” 이 솔직한 고백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문장만 덧붙여 보십시오. “그럼에도 저 사람도 주님께 세움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가, 혐오의 선을 조금씩 녹여갈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 끝까지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반박하려고 듣지 말고, 설득하려고 듣지 말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라는 마음으로 들어보십시오.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상처, 두려움, 환경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내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해 왔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진리를 진리답게 지키려면,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선을 그었던 마음이 있었다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위험한 사람”으로만 보던 눈을 거두고, 주께서 세우시는 형제와 자매로 보는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선 밖으로 나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닮아 선을 넘어가는 용기를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 주옵소서. 내 마음 안에 굳어 있는 혐오와 적대의 선들을 보게 하시고, 그 선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무너뜨려 주옵소서. 원수처럼 느껴지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이 시간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그 사람을 축복합니다. 그 사람에게도 해와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임하게 해 주옵소서. 진리를 버리지 않고도, 더 넓게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 교회에 허락해 주옵소서. 선을 허무시고, 선 밖으로 나와 우리를 품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