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가 선을 넘을 때
요나 4장 1-11절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다양한 종류의 편 가르기, 선 긋기에 대해 살펴보며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가야 할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에는 영화 “기생충”을 통해 자신과 다른 냄새로 선을 긋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혐오와 정죄의 선을 긋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연속 설교 세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선을 넘을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변화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연속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하는 주제들이 성도님들에게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러한 주제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편견과 차별과 혐오로 뒤범벅이 된 마음과 생각을 치유하는 것도 육신의 치료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우리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며 신앙생활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외면할 때,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믿기 이전보다 더 편협하고 무례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각과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와 교회 안에서 가장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선이 있습니다. 심지어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 선을 너무나 당연한 선이라고 여기기에 대부분 교인도 이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이 선을 지키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민족과 국가”라는 선입니다.
최근 우리는 “America First”라는 구호를 자주 듣습니다.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국경을 높이며, 외부인에 대한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물론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모든 나라는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내가 속한 나라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 대신 내 나라의 번영과 성공을 더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이 속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선을 긋고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국경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당혹감과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옳다 그르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주장이나 생각을 하든, 그 주장이나 생각에 ‘특정한 민족, 나라, 또는 인종은 안 돼’라는 편견과 차별의 선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우리가 그은 선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요나의 분노: "하나님,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요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흔히 요나가 니느웨가 두려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나서 4장은 요나가 도망친 진짜 이유를 충격적으로 폭로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자,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며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윤4:2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뜻을 몰라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도망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요나는 더욱 두려웠습니다. 혹시라도 이방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에게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 그것도 이스라엘의 적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은혜의 범위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유대교의 배타적 선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주의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과 우월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배타성과 우월감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흘러가는 것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요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를 보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 제 안에서 이런 생각이 스칠 때가 있습니다. “역시 우리 민족이 더 우수해.", "한국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부지런하지.”, “저 나라는 저래서 안 돼.” 은연중에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낮게 평가하고, 우리가 더 낫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 놀랍니다. “이게 뭐지?” 말로는 “모든 민족이 평등하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래도 우리가 더 특별하다”라는 선민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나도 요나구나. 내 안에도 "우리는 되고, 너희는 안 돼"라는 교만의 선이 있구나.”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는 저와 비슷한 마음이 감춰져 있지는 않으신지요?
2. America First인가, Kingdom First인가?
요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America First”를 “Kingdom First” 하나님 나라보다 앞에 둡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기독교 내셔널리즘(Christian Nationalism)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내셔널리즘이란 무엇입니까? 특정 국가의 이익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가 가졌던 선민의식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은 미국 편이다, 하나님은 우리나라 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세요.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물리쳐 주세요.”
물론 이런 기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내 나라가 먼저일 때, 하나님의 뜻보다 국가의 이익이 앞설 때, 우리는 요나처럼 하나님을 앞세우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 내셔널리즘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온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기독교 내셔널리즘은 하나님을 특정 국가의 수호신으로 축소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만 믿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요나와 똑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셔널리즘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기독교적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입장을 비기독교적이라고 정죄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며 국가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독일 교회가 히틀러의 나치를 지지할 때, 그들은 독일 민족의 부흥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남아공의 백인 교회들이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할 때, 그들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인종을 구별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나라가 먼저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라를 우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아니라 멸망해야 할 원수였습니다. 기독교 내셔널리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나라 사람,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자매가 아니라 경계하고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America First입니까, Kingdom First입니까?
3. 박넝쿨 아래에서 드러난 진짜 문제: 은혜를 권리로 착각하다
요나서의 절정은 박넝쿨 사건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성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사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는 박넝쿨로 인해 심히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하나님은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뜨거운 해가 쪼이자 요나는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분노합니다. 욘4:8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는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의 이 당당한 대답 속에는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의 십이만 명의 생명보다 자신에게 잠시 그늘을 제공해 준 박넝쿨 하나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죽을 만큼 분노하면서도,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요나의 박넝쿨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Privilege)입니다. 우리의 안락함, 경제적 풍요, 사회적 안전망,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국가의 힘과 번영입니다. 박넝쿨은 요나가 심지도 않고 재배하지도 않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사라지자 마치 자기 권리를 침해당한 것처럼 분노합니다.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내가 누리는 평안, 내가 태어난 나라의 풍요, 내가 가진 자유와 기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당연한 나의 권리로 여기며 타인을 배제하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중적인 잣대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기대하면서, 니느웨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심판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받는 은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는 “왜 저들에게까지?”라며 불편해합니다.
4. 하나님의 질문: 너는 내가 저들을 아끼는 것이 못마땅하냐?
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질문은 요나에게 던져진 것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내가 저들을 아끼는 것이 못마땅하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관점의 전환입니다. 시선의 변화입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를 보았습니다. 자기 머리 위의 그늘, 자기 편안함, 자기 민족의 안전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이만 명을 보셨습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진리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가축까지도 아끼시는 그분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Kingdom First의 시각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신앙의 정체성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미국도 한국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시민이기 이전에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님 나라에는 인종과 국경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은 하나입니다.
America First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의 복지를 추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 안보도 중요하고, 국민의 안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merica First가 우리의 신앙 정체성이 될 때입니다.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앞설 때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서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속한 나라 밖의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요나처럼 분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인가?
요나서는 요나의 대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 질문은 지금도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저들을 아끼는 것이 못마땅하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America First입니까? Kingdom First입니까? 나의 편안함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까? 우리 민족의 번영입니까? 모든 나라의 평화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모든 열방 모든 나라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선민의식이나 우월감을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모든 나라에게,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모든 약자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흐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그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America First를 외칠 때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고 Kingdom First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선을 허무시고, 선 밖으로 나와 우리를 품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