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4-피해자의 얼굴을 한 가해자

피해자의 얼굴을 한 가해자

에베소서 2:14-16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다양한 종류의 편 가르기와 선 긋기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시간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한 가해자라는 제목으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인종과 문화 차별에 관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영적 도전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류 사회에서 언어의 장벽, 인종의 차이 그리고 문화의 차이로 인해 비주류로 살아가야 하는 설움이 있습니다. 차별이 없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보이지 않는 냄새처럼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서 욕설을 듣거나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자녀가 학교에서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놀림 받았다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들려오는 ICE(이민세관단속국)의 과격한 활동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합니다. 이들은 서류 미비자를 추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인종과 종교를 겨냥한 노골적인 인종 차별의 분위기를 확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을 경험합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기에 유리 벽 또는 유리 천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승진에서 밀려나는 일이 반복됩니다. 한국 이름이 어렵다는 이유로 면접조차 받지 못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 차별의 피해자이기만 한가요? 혹시 우리도 인종 차별의 가해자는 아닌가요? 우리가 차별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누군가를 차별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리려 차별의 피해자였으니 차별을 없애는 일에 앞장서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차별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혐오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한인은 이민자로 살면서 알게 모르게 평생을 인종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만큼은 그런 차별을 받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막상 자식들이 다른 인종의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면 많은 부모가 불편해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적 차이자녀의 행복때문이라고 포장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이 깔려 있습니다.


오래전 어떤 분이 제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들이 다른 인종의 여자 친구를 데려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머리로는 인종 차별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우리 아들이 한인 여성과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 고민이 마음에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 자녀들은 겨우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젠 이게 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나와 다른 사람을 그토록 불편해하고, 선을 긋고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그들이 낯설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차별의 뿌리에는 인간의 두려움과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에서 차별은 마치 공기와도 같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나의 안전, 나의 재산, 나의 익숙한 문화가 침해당할지 모른다는 근본적인 두려움 때문에 담을 쌓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이방인과 어울려 식사를 하다 유대인들이 오자 슬그머니 식탁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합니다.


갈라디아서 2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베드로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과의 식탁에서 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족에게 비난받을까 하는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베드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내가 더 우월한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타락한 본성입니다. 우리가 선을 긋는 이유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내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인종과 문화에 대해 단순히 거부감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인종과 문화에 대해서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방식이 맞고, 저들 방식은 틀렸어." "우리 문화가 우수하고, 저들 문화는 열등해."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다른 인종과 문화를 판단합니다. 여기서부터 차별과 혐오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통해 살펴보았던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냄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본능적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우리는 냄새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냄새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나와 다른 인종과 문화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차별주의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본능적 반응, 이런 깊이 뿌리박힌 편견, 이런 무의식적 우월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져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본능적 차별은 우리 힘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절규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자신을 구원하였다고 고백합니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차별의 문제도 정확히 이 지점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차별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차별이 단순한 사회 문제나 생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별은 라는 우상을 지키기 위해 타인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깊은 영적인 죄입니다. 그렇기에 이 죄는 우리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소멸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견고한 두려움과 편견의 담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요?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1871년 고고학자들이 그 담의 경고문 실물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이 담을 넘어오지 말라. 넘어온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이것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우월감과 민족적 배타심이 만든 영적인 장벽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 율법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찢기신 자기의 육체로 이 살벌한 경계선을 무너뜨리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흑인도 백인도, 아시아인도 없습니다. 천국에 국경이 있을까요? 천국에 인종의 차별이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무셨는데 교회는 성경과 예수님을 앞세워 오히려 담을 쌓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는 왜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담을 쌓고 있는 것일까요? 선을 긋고 나와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심지어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뜻보다 우리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더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를 품는 것은 불편합니다. 내 익숙한 언어, 내 익숙한 예배 문화, 내 익숙한 관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불편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과 세상이 세운 담을 허물기 위해 불편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서나 문화적 차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담을 다시 쌓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나를 구원하는 장식품으로만 받아들이지, 우리의 기득권을 깨고 편견을 무너뜨리는 망치로는 거부합니다. 입술로는 주님, 하나 되게 하소서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주님, 우리끼리만 편안하게 하소서 믿어왔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2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둘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이 되거나,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합은 차이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그들의 아픔을, 그들의 관점을 진지하게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수자 형제자매들이 왜 목소리를 높이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겪어온 수백 년간의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다문화 사회이며 다인종 사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일성이 아니라 다문화 다인종을 품었던 다양성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다양성 대신 단일성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가정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서열을 매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담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종 차별, 모든 문화적 우월감, 모든 편견과 증오를 소멸시켰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우리와 같이 되신 자기 비움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의 교만과 두려움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비로소 담을 허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생에 걸친 회개와 거듭남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에게 차별은 본능적이기에 차별의 문제는 단순히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마트에서 다른 인종의 사람을 볼 때, 거리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가십시오.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는 죄입니다. 이것을 용서하시고 고쳐 주소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형제자매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한 자매의 차별은 우리 모두에 대한 차별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담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담을 허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인종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눈길을 보내십시오. 그들을 잠재적인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로 바라봐 주십시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들과 친구가 되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일상의 작은 선을 넘기 시작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높은 벽 앞에서 흘렸던 우리의 눈물을 주님이 아시오니, 우리를 싸매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주님,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높은 벽이 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교만 때문에, 나와 다른 이웃을 밀어내고 차별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가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국의 모형이 되게 하옵소서.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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