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5-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

창세기 1:27-28, 3:16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차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각자에게 세미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인종과 문화 차별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국가나 민족 우선주의인 내셔널리즘이나 인종과 문화 차별의 벽보다 훨씬 더 오래된 차별의 벽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차별이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차별의 선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Gender)차별의 선입니다.


여러분은 성차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조국 대한민국이 남녀의 성차별이 사라진 사회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에 대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상관없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남녀의 성차별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그냥 차별이 좀 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크고 심각합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차별의 선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끊임없는 갈등과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여성으로 사는 것은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불리합니다. 임신, 출산, 수유, 산후 회복이라는 무거운 짐을 혼자 져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여성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매달 생리통으로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의 차별도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경제지 포춘이 선정한 1,000대 기업 중 여성 CEO9.3%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여성들은 남성과 같은 일을 해도 남성보다 평균 15% 적은 임금을 받습니다. 쉽게 말해, 남성이 1231일까지 일해서 받는 연봉을, 여성은 11월 초까지만 받고 나머지 두 달은 무임금으로 일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현실입니다.


또한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직장을 다녀도 퇴근 후에도 노동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보이지 않는 노동(Mental Load)이라고 부릅니다. “냉장고에 반찬이 남았나?”, “아이들 준비물은 챙겼나?” 등등 가족 전체의 일정을 관리하고 감정을 돌보는 정서적 매니저 역할까지 도맡아 합니다. 이처럼 많은 여성이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서도 쉴 수 없는 제2의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이나 사회적 차별보다 더 무거운 짐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친구들과 저녁 늦은 시간에 헤어질 때 가장 많이 하는 인사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잘 가가 아닙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라고 합니다. 짧은 귀갓길조차 서로의 안전을 확인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 어머니, 아내, 그리고 딸들이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남성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 두려움의 무게를 우리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의 남녀 차별은 세상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대부분 교회는 여성의 비율이 보통 60%에서 70%를 훨씬 넘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은데 교회의 지도자는 대부분 남성이 독차지합니다. 한국 주요 교단의 통계에 따르면 여성 장로의 비율은 6%, 여성 목회자의 비율은 8-10% 정도입니다. 심지어 지금도 여성 장로나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도 꽤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남녀 차별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정말 남녀 차별은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질서입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남성 우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여성도 남성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남자에게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릴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는 통치권은 남녀 공동의 사명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많은 남성이 이 구절을 내세워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33: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여기서 도움이라는 히브리어가 바로 에제르입니다. 다시 말해 돕는 배필은 열등한 보조자라는 뜻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강력한 구원자이자 파트너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서로를 지배하거나 종속시키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함께 가꾸어가는 동역자이며 동반자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Gender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마저 깨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6b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새번역)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망가진 남녀관계의 비참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도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지배와 권력이 들어왔습니다. 함께 도우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관계가 힘과 권력에 따라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와 관계가 깨어졌을 때, 그 고통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배하려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모두가 불행해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이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죄로 망가진 이 세상에서 과연 남성은 승리자이기만 할까요?


오늘날 남성들, 특별히 젊은 세대의 남성들은 이전 세대가 겪지 못했던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성들은 기성세대가 누렸던 가부장적인 권위는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로부터는 여전히 기득권 남성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남자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무거운 짐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민 남성들은 이중의 공통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 사는 한인 남성들은 가정과 사회의 이중적 요구로 인해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이민 가정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은 교회와 집에서 강한 남성성을 요구받습니다. “남자가 강해야지,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야지.” 하지만 학교와 미국 사회에 나가면 정반대의 요구를 받습니다. “남성성을 드러내지 마라, 그건 위험한 것이다상반된 기대와 요구로 인해 혼란스러워합니다.


미국 기업들이 강조하는 다양성(DEI)’ 정책에서도 아시아 남성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여성이나 타 인종은 배려의 대상이 되지만, 아시아 남성은 성공한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편견 때문에,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이 유리 천장에 막혀있다면 아시안 남성들은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에 막혀서 백인 주류에도 끼지 못하고 소수자 혜택도 받지 못하는 이중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남성들은 생각합니다. “여성은 차별받는 것이 정체성이라서 여성을 조금이라도 배려하지 않으면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여성들은 피해자라는 입장만 내세우며 특혜만 받으려 한다.”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직장 내 성희롱과 유리 천장, 거리에서의 안전 위협 같은 일상적 차별을 남성들은 모른 채 이제 여자가 더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남녀 간의 갈등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여성은 수천 년간 쌓여온 차별의 역사 위에서 겨우 얻어낸 권리를 다시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반면 젊은 남성 세대들은 자신들은 여성을 차별한 적도 없고 여성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여성보다 더 많은 희생을 요구받는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오랫동안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했던 한국에서의 Gender 갈등은 더욱더 극단적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을 한남충, 개저씨라고 비하합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김치녀, 된장녀라고 비하합니다. 갈수록 한국 사회에서의 Gender 문제는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결핍이 만든 이 높은 차별과 혐오의 벽 앞에서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지는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전쟁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합니까? 여성 편입니까, 남성 편입니까? 여성이 수천 년간 받아온 구조적 차별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여성들은 투표권도 없었고, 재산권도 없었고, 교육받을 권리도 제한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위협은 여전히 실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의 고통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과거 세대의 죄 값을 치르고 있다고 느낍니다. 문제는 이 두 고통이 서로를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더 힘들어” vs “남자들이 더 역차별받아라는 피해자 경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누가 더 피해자인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1세기 유대 사회는 여성 인권의 암흑기였습니다. 여성은 인구 조사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법정 증인 자격도 없었습니다.


유대 남성들은 매일 자신들이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는 기도를 했습니다. 랍비들은 여자와 대화하느니 율법책을 태우는 게 낫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태어나는 데 여자를 무시하는 것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무시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도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셨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여성에 대한 태도는 파격을 넘어 혁명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누시며 그녀를 예배자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냐면 제자들조차 이 모습을 이상히 여길 정도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여성을 식탁의 파트너이자 제자로 대우하셨습니다.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던 혈루증 앓는 여인을 향해서는 딸아라고 부르시며 그녀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은 당시 법적 증인 능력도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가 만든 가장 높고 견고한 성별의 담을 당신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의 편도, 남성의 편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차별 아래 신음하는 모든 인간의 편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더 큰 피해자인가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회개하고, 모두가 용서하고, 모두가 새롭게 시작하라고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승리의 깃발이 아닙니다. 남성은 남성 우월주의적인 교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성은 오랜 상처와 아픔이 오늘의 관계를 망치지 않도록 치유받기 위해 그 상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 죄인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오래된 그리고 마음 아픈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가장 오래된 선, 그 선이 만들어낸 고통과 분노와 혐오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남녀 간의 갈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남성 여러분, 아내나 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고 계십니까?” “여성 여러분, 남성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들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고 계십니까?” 이번 한 주간,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남녀 차별의 선이 우리 삶과 가정과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는 시간과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있는 차별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 가시길 소망합니다.


여자와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공평하게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서로를 돕는 동역자로 부르셨는데,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 인간의 탐욕으로 갈등과 차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교만과 두려움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막힌 담을 헐고 화해와 치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그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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