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는 축복이고, 차별은 죄다
갈라디아서 3:28 에베소서 5:21-25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 안에 감추어진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차이는 축복이고, 차별은 죄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인간이 만든 비극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남녀가 서로 다른 차이는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은 죄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평등하고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가 어떻게 전쟁터로 변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여성들이 겪는 사회구조적 차별과 젊은 남성들이 느끼는 역차별이 어떻게 서로를 향한 혐오로 번지고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남녀 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왜 남녀의 역할을 두고는 교단마다, 목사마다, 교인마다 큰 차이가 있을까요?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왜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 서로의 차이를 넘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길을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 신학적 입장: 상호보완주의와 평등주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녀의 역할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신학적 입장이 존재합니다. 상호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와 평등주의(Egalitarianism)입니다.
상호보완주의는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존엄과 가치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등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맡기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에베소서 5장 22-24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 밖에도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고린도전서 11장 3절 등을 근거로 삼습니다.
상호보완주의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남편은 영적 리더십과 최종 의사결정의 책임을 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재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강점은 성경의 구절을 문자적으로 존중하고, 가정과 교회에 명확한 질서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입장을 진지하게 따르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팀 켈러 목사와 캐시 켈러 부부가 그 예입니다. 그들은 “결혼의 의미”라는 책을 함께 썼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 책에서 남편의 머리됨이란 아내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책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중요한 결정 앞에서 캐시의 의견을 가장 중요한 조언으로 여겼고, 캐시는 남편과 신학적 견해가 다를 때도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상호보완주의자들이 말하는 섬기는 리더십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는 매우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성경 해석이 여성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됐습니다. 남편의 머리됨이 가정 폭력의 구실이 되거나, 여성의 은사를 억누르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지도자들 이를테면 사사 드보라, 선지자 훌다, 교사 브리스길라, 바울이 인정한 유니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반면에 평등주의는 남녀가 존엄과 가치뿐만 아니라 역할도 동등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도 성별의 제한이 없다고 봅니다. 평등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또한 지난주 살펴보았던 창세기 1장 27-28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통치권을 남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평등주의자들은 상호보완주의자들이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 에베소서 5장과 디모데전서 2장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에베소서 5장의 경우, 22절보다 먼저 나오는 21절을 주목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부부는 아내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복종하는 상호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머리됨은 권위가 아니라 희생적 사랑입니다. 많은 신약학자는 성경에서 머리(케팔레)가 권위보다는 근원이나 섬김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상호보완주의자들이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을 근거로 여성은 절대로 교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딤전2:11-12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것에 대해 평등주의자는 이것은 1세기 에베소 교회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의 여성 사제들이 영적 권위를 독점하며 남성을 지배하는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된 일부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도 이방 종교의 습관을 따라 그릇된 교리를 퍼뜨리는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자는 가르칠 수 없다는 바울의 권고는 에베소 교회만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목회적 대응이지,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성을 침묵시킨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을 침묵시킨 것입니다.
평등주의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태초의 하나님 창조에 따르면 남녀가 동등한 통치권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다스리고 아내가 복종하는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아니라 인간 타락의 결과입니다(창 3:16).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고후5:17),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타락으로 왜곡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속한 감리교회는 평등주의적 입장을 따라왔습니다. 감리교회는 1955년부터 여성 목사 안수를 인정해왔으며, 현재 우리 교단의 여성 목사 비율은 대략 15% 정도입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전밀라 전도사는 1955년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로 여성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당시 여성 목사 안수에 대한 엄청난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밀라 목사는 평생을 농촌 교회와 여성 교육에 헌신하며 성별이 아닌 은사와 소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음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 여성도 목사가 되고 설교할 수 있게 된 것은 용기 있는 여성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감리교 목회자로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신학과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별과 무관하게 은사를 부어주신다고 믿으며, 남녀가 동등하게 교회의 사역과 헌신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이 목사와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학적 입장의 차이가 사랑의 연합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예를 들었지만 리디머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팀 켈러 목사님은 철저한 상호보완주의자였습니다. 남녀의 역할과 차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리디머 장로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동역자 중에는 평등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신학적 차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의 연합과 동역을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합은 신학적 입장의 일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서 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성숙입니다. 우리와 다른 입장을 가진 형제자매를 성경을 모르는 사람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가진 입장을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천국 헌법: 차이는 차별이 아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모두가 똑같다는 획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문화적 차이, 종과 자유인의 사회적 차이,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를 지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선언은 사람의 차이(Difference)가 차별(Discrimination)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천국 헌법과도 같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이 헬라인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자유인이 종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등한 상속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사람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이 발보다 우월하지 않고, 눈이 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체의 지체는 각자의 고유한 기능이 있으며,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악기가 하나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이루듯,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다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협주를 연주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여자가 뭘 알아?” 여자는 남자를 향해 “남자가 뭘 알아” 이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세상은 권력 다툼과 주도권 싸움으로 젠더 갈등을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 안에서의 동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합시다
남편 여러분, 이번 주에는 결정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단순히 '당신 생각은 어때?'라고 묻는 것을 넘어,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고민이나 나의 약점을 아내에게 솔직하게 고백해 보십시오. '여보, 내가 이 문제 때문에 힘든데 당신이 좀 도와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라고 물으십시오. 나의 강함이 아니라 나의 약함을 아내 앞에 드러내는 것, 그것이 아내를 진정한 동역자로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거룩한 용기입니다."
아내 여러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넘어갔던 침묵의 선을 이제는 넘으십시오. 남편이 혼자 결정하려 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당당히 말하십시오. 남편이 힘들어할 때는, “내가 함께 짊어질게”라고 말하십시오. 이것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남편의 부족함을 채우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에제르, 돕는 배필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에서도 여자가 나서면 덕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매여 침묵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암탉이 울어야 알을 낳습니다. 여성이 목소리를 내야 교회가 생명을 낳고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경꾼이 아니라 동등한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성별의 장벽이 아니라 은사와 소명에 따라 리더십을 세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천국 헌법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함께
우리는 지난 두 주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서로를 돕는 평등한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려 했던 인간의 죄는 이 아름다운 관계를 무너뜨렸고, 서로 돕는 관계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변질시켰습니다.
그 비극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수천 년간 겹겹이 쌓인 차별의 역사 앞에서 분노하고,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과거의 빚을 대신 갚으라는 현실 앞에 억울해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기보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인지를 경쟁하며, 차가운 혐오의 언어를 가시처럼 내뱉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높고 견고한 담을 당신의 몸을 찢어 허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찢어진 그 몸은 지배하는 자의 교만도, 지배당하는 자의 상처도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오래되고 견고한 성별의 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남자 대 여자의 전쟁을 멈추고, 우리 모두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아래 나란히 서야 합니다.
남성 여러분, 여성을 발아래 두려 했던 그 손을 내려놓으십시오. 여성 여러분, 홀로 짊어져야 했던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빈손이 될 때 비로소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이기에 참아야 했던 눈물도, 여성이기에 흘려야 했던 눈물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십자가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 자리입니다. 그 은혜 앞에 설 때, 가장 오래된 차별의 선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사이에 서 계실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남녀 차별의 선을 지워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동등한 동역자로 부르셨는데, 죄로 인해 우리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담이 허물어졌음을 고백합니다.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 사랑 안에서 연합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의 교만과 상처와 두려움을 십자가 앞에 가져오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성별의 선이 지워지고, 서로의 은사를 꽃피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동역하는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