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ither, 하나님은 누구 편이신가?
여호수아 5:13-15, 누가복음 6:13-16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차별과 혐오의 선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국가와 민족에 따른 차별, 인종 차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어진 성별의 선을 허무는 십자가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Neither, 하나님은 누구 편이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전하는 말씀은 우리 사회와 교회를 극단적으로 가르고 있는 가장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정치와 이념의 선입니다.
2025년 1월, 미국 텍사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영국에 살던 23세 여성 루시 해리슨이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했다가 아버지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비극의 발단은 평범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눈 정치적 논쟁이었습니다.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총기 규제 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딸은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물론 이 충격적 사건을 정치적 갈등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음주, 총기 부주의, 가정 내의 복잡한 관계가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날 아침의 정치적 논쟁은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감정을 심각하게 자극했습니다.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황에서 아버지의 음주와 총이 겹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정이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부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UCLA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선 이후 추수감사절 가족 식사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단축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록 총성이 울리지 않아도, 정치는 이미 우리의 가족과 공동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와 이념으로 선을 나누는 일에 교회도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보 성향의 교인은 보수 성향의 교인을 보며 “저 사람이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인가?” 의심합니다. 반대로 보수 성향의 교인은 진보 성향의 교인에 대해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저런 정책을 지지할 수 있지?” 분노합니다. 같은 교회에서도 정치적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말도 섞지 않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묶인 형제자매입니까? 아니면 투표소에서 마주칠 적들입니까?
정치의 우상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교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줄 서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확인하면 적대시합니다. 심지어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을 상종 못 할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정치적 견해 차이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악마화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요?
그 근본 원인은 우리가 정치를 인생 최고의 우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 목사가 쓴 “내가 만든 신”이란 책에서 그는 우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상이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신뢰하고, 더 순종하는 그 어떤 것이다.” 우상은 단순히 금송아지나 나무 조각상만이 아닙니다. 정치도, 이념도, 내가 지지하는 정당도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마음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분노입니다. 정치를 우상으로 삼은 사람은 선거 결과 하나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거나, 승리감에 사로잡힙니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몰두하며 열광하거나 분노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치를 우상으로 삼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나의 신념과 이익을 더 확실히 보장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정치는 신앙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화의 파트너가 아니라 무너뜨려야 할 '악'이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를, 단지 정치적 주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앙의 적으로 정죄하는 비극을 반복하게 됩니다.
더 심각한 사실은 많은 교회와 교인이 하나님을 정치의 도구로 삼는 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반대편을 정죄와 심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은 나의 정치적 신념이 승리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깊고 아픈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낯선 땅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을 안고 삽니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고국의 정치 상황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지하는 진영과 강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미국 정치보다 한국 정치에 더 큰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갈망이 아무리 절실할지라도,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 하나님 나라의 의보다 앞설 때 이것은 정치와 이념을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삼는 일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속은 정당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대답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에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앞에는 거대하고 막강한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긴장감이 감도는 어느 날, 이스라엘의 두 번째 지도자 여호수아가 혼자서 정찰을 나갔다가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마주합니다.
여호수아가 낯선 사람에게 묻습니다. 수5:13b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여호수아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질문과 똑같습니다. “너는 보수냐, 진보냐?”, “너는 나의 편이냐, 적의 편이냐?”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수5:14a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우리말 성경은 단순히 ‘아니라’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은 이것을 ‘Neither’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의 편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너를 하나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여호수아야, 질문이 틀렸다. 내가 네 편인지를 묻지 말고, 네가 내 편에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수5:15a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 명령은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명령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향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인간의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으라는 요구였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나의 권리와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벗어야 할 신발은 무엇입니까? 내 정치적 신념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 내 진영만이 정의라는 교만의 신발입니다. 그 신을 벗고 하나님의 통치 앞에 단독자로 설 때, 비로소 우리는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신을 벗고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편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여호수아가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의 공존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느 진영의 편도 아니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중립을 지키거나 정치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정당의 편도 아니시지만, 공의에는 분명히 편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긍휼에 대해서는 중립이 아니십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가난한 자, 나그네, 억압받는 자, 고아와 과부의 편이심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이 가장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이 정책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내 진영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인가? 우리는 특정 정당이나 이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절실한 곳을 향해 가장 분명하고도 거룩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물론 이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람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분은 보수적인 가치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견고한 질서와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고, 또 어떤 분은 진보적인 가치 안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와 배려를 일구어내려 노력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지하는 이념이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사랑보다 앞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짓밟게 됩니다. 우리가 이념의 깃발을 높이 들기 위해 형제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아프게 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을 벗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수천 년 뒤, 예수님은 그 원리를 열두 제자의 공동체 안에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6장 13절 이하는 예수님 열두 제자의 명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도저히 한자리에 앉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입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당시 로마의 지배에 무력으로 저항하던 유대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독립투사이자 과격한 혁명가였습니다. 반면 세리였던 마태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 제국에 바치며 부를 축적했던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으면 충돌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세상에선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제자로 부르셨고, 한 식탁에 앉히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치적 신념보다 더 큰 정체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열심당원이기 전에 나의 제자다. 너는 세리이기 전에 나의 제자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더 크고 중요한 정체성을 통해 시몬과 마태는 비로소 서로를 적이 아닌 동료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정치적 신념이 1순위가 될 때, 다른 편은 적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1순위가 될 때, 다른 편도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묶여 한 몸을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신비이자 기적입니다.
신발을 벗고 형제를 품으십시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노예제라는 거대한 악과 평생 싸우면서도, 그 제도를 지탱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깨닫기도 전에 먼저 찾아오는 짝사랑”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감리교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선행은총’의 교리입니다.
햇빛이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세상을 비추듯,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가망 없다며 선을 그어버린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웨슬리는 불의한 제도와는 당당히 맞서되, 그 사람 안에 숨겨진 구원의 가능성은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내가 그 사람을 비난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 안에 그어진 정치의 선을 허무는 시작입니다.
정치적 확신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그 확신이 틀릴 수 없다는 교만의 신발은 벗어야 합니다.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가 한 식탁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계신 예수님이 그들의 신념보다 크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그 사람 안에도 계심을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우리 안의 교만의 신발을 벗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궁극적 소속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이 땅의 정치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정치가 우리 공동체를 갈라놓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어놓은 선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정치적 신념보다 예수님이 더 크신 교회, 이념의 선보다 십자가의 사랑이 더 넓은 자유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정의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이 그어놓은 정치의 선 안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정죄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착각하며 하나님마저 내 편으로 만들려 했던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열심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가 한 식탁에 앉았던 그 기적 같은 사랑이 우리 교회 안에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살지만, 자신의 신념이 형제를 미워하는 무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나와 다른 길을 걷는 이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동역자임을 믿는 겸손을 주옵소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억압받는 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되, 그 마음이 특정 정당의 깃발이 아닌 십자가의 깃발 아래 서게 하옵소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