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와 “되면 한다” 사이의 복음
출애굽기 3:6 / 사도행전 2:17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갈라놓는 차별과 배제와 미움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열 번째 시간으로 “하면 된다”와 “되면 한다” 사이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세대 간의 갈등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놓인 세대의 장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이는 가장 사랑하는 관계이면서도, 많은 가정이 서로를 이해하고 품지 못하는 가슴 아픈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은 세대 간의 장벽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교회로 확장해 살펴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은 단순한 문화 차이를 넘어 세대 전쟁이라 불릴 만큼 심각합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 사회 갈등 요인 중 세대 갈등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세대 간의 경제적 불평등과 결합하여 서로를 향한 혐오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나약한 세대로 비난합니다. 청년세대는 어른들을 걸림돌로 여기며 사회적 고립을 선택합니다.
특별히 우리 이민 사회에서 이 갈등은 더 복합적입니다. 단순히 나이 차이가 아니라 가치관의 충돌입니다. 1세 부모님들에게 성공은 생존이었고 집을 사는 것이고 안정된 전문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안정된 전문직을 가지는 것을 이민 생활의 최고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란 2세에게 성공은 자아실현이며 사회적 가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보기엔 자녀가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 같고, 자녀가 보기엔 부모님이 물질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와 수평적 소통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가 충돌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낯선 적처럼 느끼게 되었을까요? 이 장벽 앞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 더 나아가 우리 안에 그어진 견고한 선을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복해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세대 갈등은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가 사치스럽고 예절이 없다며 걱정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기성세대의 한탄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향해 건방지고 버릇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대 갈등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단순히 나이 차이 또는 성격 차이 정도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단순한 진단입니다. 세대 갈등의 뿌리는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경제적 현실,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날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같은 시대를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고도성장의 시대를 몸으로 통과했습니다. “하면 된다”라는 정신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실제로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고, 성실하면 승진할 수 있었고, 고생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경험이 기성세대의 가치관 안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세대는 전혀 다른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값은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교를 졸업해도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구조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되면 한다”라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이민 교회의 2세들도 같은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단군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구조적 불평등 앞에 서 있습니다.
부모 세대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치솟는 집값과 학자금, 불안정한 고용 앞에서 “열심히 해도 안 된다”라는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 때는 더 힘들었어도 해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격려나 사랑의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 간극(갭)이 만들어 내는 결과는 상호 오해와 불신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입니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렇게 의지가 없나. 우리 때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했는데” 말합니다. 반면에 젊은 세대는 “그분들이 살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불평등한 구조를 만든 세대가 지금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고 비난만 한다.”라며 억울해합니다.
정보 환경의 차이도 이러한 갈등을 키웁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합니다. 기성세대는 주로 신문과 지상파 방송을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젊은 세대는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사건을 두고 두 세대는 마치 다른 사건을 본 것처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언어의 차이도 있습니다. 꼰대, MZ, 라떼는 말이야 같은 표현들이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처럼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규정하는 라벨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대 갈등은 단지 나이 차이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보 생태계, 경제적 현실이 충돌하는 구조적 사건입니다. 서로의 세계를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서로의 차이는 단순한 오해를 넘어 서로를 향한 경멸이 됩니다.
세대의 장벽은 교회 밖 일상에서 더 자주, 더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직장에서 기성세대 상사는 말합니다. “우리 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어.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따지고 드나.” 젊은 세대 직원은 생각합니다. “왜 이유도 모르고 따라야 하나. 납득이 되어야 움직이지.” 물론 둘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만의 경험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가장 아픈 것은 이 갈등이 가족 안으로도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명절에 모인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세대가 갈립니다. 취업과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부모는 “왜 이렇게 의욕이 없냐”라고 하고, 자녀는 “왜 어른들은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모르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현실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상이 세대를 나누어 싸울 때, 교회가 똑같이 나뉜다면 교회는 세상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세대를 넘어 함께 서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것 자체가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 혹은 야곱만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3세대의 이름을 나란히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어느 한 세대만의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세대만의 교회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2세대만의 교회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 세대가 함께 서 있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기억하는 어른들과 꿈꾸는 젊은이들이 한자리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은 이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께서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특정 세대에게만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 세대, 젊은이, 늙은이 모두를 동시에 부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세대를 가리지 않으십니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를 맞히는 점술이 아닙니다. 자녀 세대가 예언한다는 사도행전의 말씀은 부모 세대가 눈물로 심어준 신앙의 유산이 자녀들의 입술을 통해 이 시대의 진리로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기도가 자녀의 언어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질 때, 세대의 선은 사라지고 거룩한 계승이 시작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청년들의 눈이 열린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불평등과 ‘열심히 해도 안 된다’라는 절벽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던 젊은이들이, 성령이 주시는 ‘환상(Vision)’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떻게 회복시키실지에 대한 거룩한 청사진입니다. 청년들이 이 환상을 품을 때, 교회는 정체된 조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이 늙은이들에게 ‘추억’이 아닌 ‘꿈’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쇠하고 시대는 변하여 “이제 내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나려는 어른들에게, 성령은 다시 ‘꿈(Dreams)’을 주십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꾸는 꿈은 욕심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어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꿈은 다음 세대가 걸어갈 든든한 지도가 됩니다.
성령께서 세 세대를 동시에 부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느 한 세대의 언어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은사와 사명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엮일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됩니다.
세대 갈등이 깊어지는 이유는 서로를 나쁘게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더 낫게 보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는 경험이 많으니 더 낫다고 생각하고, 젊은 세대는 깨어있으니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대를 나보다 낫게(better)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것은 상대의 의견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 세대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일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돌본다는 말씀은 관심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가 겪는 고용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내 일처럼 들여다봐야 합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이민자로 살며 겪었던 고독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바쳤던 눈물의 세월을 내 일처럼 존중해야 합니다. 나의 관심사 안에 상대방의 관심사를 포함시키는 것, 그것이 세대의 선을 넘는 첫걸음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셨지만, 그것을 권리로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에게 먼저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더 큰 권위를 가진 쪽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 분들, 더 오랜 시간 교회를 지켜오신 분들이 먼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권위는 위에서 누르는 힘이 아니라, 아래로 흘려보내는 사랑일 때 비로소 영성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세대가 먼저 자신을 낮추는 것이 그리스도의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세상은 세대 전쟁을 말합니다. 어느 시대가 더 나쁘고 어느 세대가 더 이기적인지를 두고 싸웁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대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 서로 다른 세대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한자리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세대의 언어와 문화 안에 갇히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히셨고, 청년 부자에게 다가가셨고, 나이 든 바리새인과 대화하셨습니다. 모든 세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회가 그 예수님을 따른다면, 교회는 세상이 만들어 낸 세대 전쟁에서 비켜 서서 다른 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 앉아 있다고 함께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예배드린다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어린 자녀들과 청년이 "이 교회에서 내 생각을 말해도 괜찮다"라고 느끼고 있습니까? 그들의 눈에 우리 어른들이 걸림돌이 아니라 든든한 동반자로 보이고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어른들에게는 꿈을 주십니다. "이제 내 시대는 끝났다"고 뒤로 물러서려는 어른들에게, 성령은 다시 꿈을 심으십니다. 그 꿈은 욕심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어른들이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을 때, 그 꿈은 우리 청년과 자녀들이 걸어갈 든든한 지도가 됩니다.
청년에게는 환상을 주십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절벽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던 젊은이가 성령의 환상을 품을 때,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불평등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떻게 회복시키실지를 보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예언을 주십니다. 어른들이 눈물로 심어준 기도가 자녀들의 입술에서 이 시대의 진리로 선포될 때, 세대의 선은 사라지고 거룩한 계승이 시작됩니다.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먼저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먼저 물으셨습니다. 먼저 들으셨습니다.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세대의 선을 허무는 일은 언제나 더 많이 가진 쪽이 먼저 내려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꿈과 청년의 환상과 자녀들의 예언이 한자리에서 어우러지는 교회와 가정을 만들어 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어른들에게 꿈을 주옵소서. "내 시대는 끝났다"고 물러서려는 마음을 거두고, 다음 세대를 위한 소망의 꿈을 다시 품게 하옵소서. 그 꿈이 우리 청년과 자녀들이 걸어갈 지도가 되게 하옵소서. 청년에게 환상을 주옵소서.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 땅을 회복시키실 거룩한 청사진을 보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자녀들의 입술에 예언을 주옵소서. 어른들의 눈물 어린 기도가 이 아이들의 언어로 세상에 선포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어른들이 먼저 내려가는 용기를 주옵소서. 먼저 묻고, 먼저 듣고, 먼저 손 내미는 겸손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세대 연합의 증거가 되게 하옵소서. 세대의 장벽을 허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