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1-월요일의 하나님

월요일의 하나님

마태복음 27:50~51a 사도행전 10:9-16

 

지금까지 우리는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여러 선과 장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민족의 선, 인종의 선, 이념의 선, 성별의 선, 세대의 선까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그 선들을 뛰어넘게 하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월요일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시리즈 11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선들 사이에는 공통된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우리와 그들, 안과 밖으로 나누는 흑백논리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이원론(Dualism)이라고 부릅니다. 흑백논리에 기초한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으며 여기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이고 한 사람의 내면을 나누는 여러 선이 만들어집니다.


주일 아침,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직장에 나가거나, 가게 문을 열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할 때는 그 거룩함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먹고살기 위한 세상일이지,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엿새를 버텨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일에는 거룩한 예배자로 살지만, 나머지 엿새는 신앙과는 무관한 생존의 시간으로 여기는 것 역시, 거룩한 일과 부정한 일로 나누는 이원론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반으로 쪼개는 날카로운 칼과 같은 사고방식인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에까지 영향을 끼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흑백으로 보게 만드는 색안경과 같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보면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가치관처럼 여겨집니다. 레위기를 비롯한 율법서는 정말 꼼꼼하게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눕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철저하게 구별합니다. 심지어 성소도 하나님만 계시는 지성소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성소로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머무신다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한 사람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셨는데, 우리가 그 구별을 따르는 것이 왜 잘못이라는 것인가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구약의 구별과 우리가 흔히 빠지는 이원론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부엌에 들어오면 부모는 가스 불은 절대로 켜지 말고, 뜨거운 냄비나 칼은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불이나 냄비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아직 불이나 주방 기구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혼자서도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면 부모가 그어놓았던 경계선은 모두 사라집니다. 오히려 주방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합니다. 주방 도구를 다치지 않고 다룰 줄 아는 성숙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거룩하다라는 말은 구별되다,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 동물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한 경계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도 정결 의식을 통해 다시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구별은 일종의 거룩 교육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거룩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경외롭고 특별한 것인지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울타리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 구별의 최종 목적은 배제가 아니라 통합이었습니다. 구약의 구별은 언젠가 온 세상이 거룩해질 날을 향해 나아가는 전략적 경계선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법에서는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에 닿으면 거룩한 것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만지셨을 때,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병 환자가 깨끗해졌습니다. 구약의 거룩이 오염을 막기 위해 경계선이었다면, 예수님의 거룩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는 구약성경이 보여준 거룩을 오해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복음의 확장성 대신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원론이라는 잘못된 색안경을 덧씌운 것입니다. 영혼은 깨끗하고 영원하지만, 육체와 물질세계는 더럽고 가치가 없다는 이원론 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이 기독교 신앙에 끼친 가장 심각한 왜곡은 우리의 일상을 영적인 장애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에서의 영성과 기도만이 거룩한 것이라 가르쳤고, 밖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손이나 기술자들의 노동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비천한 일로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은 우리의 육신을 영혼의 감옥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전으로 지으신 우리의 육체를 그저 썩어 없어질 껍데기 정도로만 여기다 보니 노동하고 아이를 돌보고 장사하고 밥을 먹는 육체적인 활동을 저급하고 속된 것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찬양과 기도와 같은 영적인 활동만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 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마저 왜곡시켰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더러운 세상과 육체에서 벗어나 저 멀리 천당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믿게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학이 플라톤 이원론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신 사건은 플라톤 이원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고백입니다.


세상과 육체가 본질적으로 열등하고 악하다면, 하나님이 왜 굳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겠습니까? 몸의 부활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저항하며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싸움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우리의 신앙 안으로 이원론은 끊임없이 스며들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 스스로 거룩한 곳과 저급한 곳으로 쪼개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교회라는 작은 상자 안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 뿌리 깊은 이원론의 허상을 허물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사건입니다.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엄격하게 나누던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성소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고 두껍게 짜인 것으로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찢을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이었습니다. 이 휘장 너머로는 대제사장 단 한 사람만, 그것도 일 년에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단번에 둘로 찢어졌습니다.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찢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라는 특정한 종교적 공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 임재하는 분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성소 휘장이 둘로 쪼개지면서 역설적으로 세상과 성전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장소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일상을 살기 위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거룩한 지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소의 벽을 허물어 온 세상을 성소로 삼으셨기에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상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거룩함과 부정한 것을 나누려는 이원론의 안개가 남아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유대인은 거룩하고 이방인은 부정하다는 흑백의 색안경을 쓰고 사람과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율법이 부정하다고 여겨 금지했던 온갖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평생 부정하다고 먹지 않았던 음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이 들립니다. 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에게 들려온 음성은 단순히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눈에 씌워져 있던 이원론의 색안경을 벗기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수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소의 벽(휘장)을 허무셨기에, 이제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일상 역시 거룩해졌음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깨달음을 얻고 비로소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탈출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러 오셨습니다. 복음의 이 진리가 우리 삶과 일상에 중대한 변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악된 세상을 피해 도망쳐온 피난처가 아닙니다. 교회는 월요일이라는 선교지로 파송 받기 위해 모여서 훈련하고 준비하는 베이스캠프와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대신 이제 나의 또 다른 성소로 예배드리러 간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월요일 당신의 책상 위에도, 화요일 부엌 싱크대 앞에도, 수요일 운전대 위에도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예배드릴 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에 있던 수도원 주방에서 일생을 보낸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라는 수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고, 그릇을 씻고, 솥을 닦는 일을 15년 동안 했습니다. 그가 남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다르게 여기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하는 부엌의 소음과 혼잡 속에서도, 나는 무릎 꿇고 성찬을 받을 때와 똑같은 평온함으로 하나님을 모신다.” 그에게는 음식을 만드는 부엌이 성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식사를 마친 그릇을 닦는 설거지통이 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손이 곧 예배하는 손이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은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다른 사람들처럼 단기 선교를 다녀온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선교지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저는 그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단기 선교를 가야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자랑하는 선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모든 일이 성직이고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세상의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우리도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된 일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없이 행하는 속된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과 속의 선과 담은 성경이 세운 담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은 선이며 사람이 쌓은 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가나의 결혼 잔치 자리에서 첫 기적을 행하셨고, 어부의 배 위에서 가르치셨으며, 나사렛 목수 작업장에서 30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써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성전 휘장을 직접 찢으셨습니다. 사람이 긋고 쌓은 선과 담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원히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거룩함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자리가 어디든, 그 자리가 거룩한 지성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그 삶이 바로 세상 한복판에서 선포되는 가장 강력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주일만 그리스도인인 파트타임 신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그 날,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의 모든 현장으로 쏟아져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내일 월요일 아침, 일터로 나설 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으로 쫓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소로 예배드리러 나가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과 도전이 저와 여러분의 삶과 신앙의 여정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하나님을 뒤에 남겨두고 나왔습니다. 성전 휘장을 친히 찢으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새롭게 눈을 열어 주옵소서. 우리의 일터가 소명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부엌이 예배의 자리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일만 아니라 월요일도 주님의 날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간, 성도들이 발을 딛는 곳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하는 정직함과 사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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