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2-영혼만 구원받으면 됩니까?

영혼만 구원받으면 됩니까?

로마서 12:1 고린도전서 6:19-20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시리즈 12번째 시간으로 영혼만 구원받으면 됩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에는 월요일의 하나님이란 설교를 통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성전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공간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가 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 신앙을 반쪽짜리로 만들어온 또 하나의 견고한 선인 영혼과 몸을 나누는 이원론의 장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영혼이 구원받았다 고백하지만, 내 몸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다수 교인이 생각하는 구원은 몸과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만의 구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인은 사후 세계 또는 내세는 영혼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얼핏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처럼 여겨집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썩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썩어져 사라지는 육체는 내세에 들어가지 못하고 육체를 떠난 영혼만이 내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기독교인이든 타 종교인이든 내세를 믿는 대부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믿음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비가 오면 쑤시는 여러분의 무릎 통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신 것일까요? 온종일 서서 일하느라 부어오른 여러분의 다리와 거칠어진 손마디를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혼만 관심을 가지고 영혼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일까요?


육신은 사라지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원관은 얼핏 생각하기에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처럼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육체는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든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한 줌의 흙이나 재로 변하고 맙니다. 따라서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불멸하여 하늘나라에 간다고 믿는 것은, 언뜻 보면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나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은 세상을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로, 인간 역시 육체와 영혼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열등하여 소멸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불멸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열등하고 저급하지만, 영혼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고상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한 상태를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며, 육체 안에 갇혀 있던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인간의 구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플라톤에게 구원이란 육체라는 감옥에서 영혼이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탈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플라톤 철학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당히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들리는 그럴듯한 주장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모순을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매력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이유로 육체와 영혼을 엄격하게 나누는 플라톤의 이원론은 수천 년에 걸쳐 심지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이원론과 인간의 육체는 소멸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 불멸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몸도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보면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많은 사람이 육신이 죽은 다음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소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은 소멸이 아닙니다. 3:19b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죽음은 우리의 몸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역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왔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형상에 하나님의 호흡이라고 하는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므로 사람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생명체)이 되니라


여기서 생령이란 히브리어로는 네페쉬’, 즉 생명력을 가진 몸이란 뜻으로 몸과 영 모두를 한 몸에 지닌 살아있는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사람은 몸만으로 또는 영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몸과 영이 하나로 통합된 전인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몸을 가진 영혼이자 영혼을 가진 몸이 생명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영혼으로 번역한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영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몸과 분리된 유령 같은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혼은 몸과 영을 지닌, 살아 움직이는 전인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몸과 영을 지닌 생령 또는 생명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네페쉬입니다. 히브리어 네페쉬를 헬라어로 옮긴 단어가 바로 신약의 푸쉬케입니다. 성경에서 영혼이란 단순히 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명 전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존재 전체를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플라톤의 이원론처럼 물질세계나 인간의 육신을 열등하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을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영이라는 단어보다 몸 또는 육신이라는 단어가 두 배 넘게 더 나옵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만약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영혼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체로 세상에 오셔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구원이 육체와는 상관없는 오직 영혼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불필요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신 사건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했던 사건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덤이 비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 소멸한다고 여겼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손의 못 자국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의 몸도 구원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플라톤에게 구원이란 육체라는 감옥에서 영혼이 탈출하는 것이라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와 세상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플라톤의 구원이 낡은 자동차에서 엔진(영혼)을 빼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낡은 자동차 전체를 새 차로 만드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기에 전 세계의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영혼만이 아닌 몸도 포함하는 전인적 구원이라는 진리는 오늘 우리 삶에 어떤 도전을 주며, 어떤 변화를 요구합니까?


사도 바울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던 로마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1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 영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너희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배는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몸과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와 찬양만 영적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밥을 먹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감사함으로 잠자리에 드는 그 모든 육체적인 일상을 가장 영적인 예배로 받으십니다. 몸을 가진 인간이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내는 일상,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선포한 예배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을 잘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영적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의 몸에 대해 하나님께서 받은 것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전, 즉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의 선언처럼 우리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성전을 어떻게 관리해야 합니까? 정성껏 돌봐야 합니다. 적절한 식사를 챙기고, 충분한 잠을 자고,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는 것은 성령의 전을 관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영적 수행입니다.


우리 이민 사회의 삶의 구조 자체가 몸을 돌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게를 열어야 하니 제대로 못 자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 밥은 대충 먹고, 쉬는 것이 죄스러워서 몸이 망가질 때까지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몸이 망가지도록 함부로 남용하는 것은 지극히 비신앙적 태도입니다.


내 몸이 소중하다면, 질병과 가난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몸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고통받는 타인의 몸을 돌보고, 그들의 신체적 안전과 생존권을 지켜주는 것은 지극히 영적인 행위입니다. 나를 돌보는 개인적 성화는 고통받는 타인의 몸을 보듬는 사회적 성화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고통만이 아니라 몸소 빚어주신 우리 몸의 고통도 안타까워하십니다.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아 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입니다. 이것은 우리 육신의 상처와 고통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민 1세대의 삶은 몸을 혹독하게 움직여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힘든 삶입니다. 그래서 무릎이 아파도, 허리가 아파도, 손마디가 굳어도 참고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혹시 이런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 영혼에는 관심이 있으시겠지만, 이 아픈 무릎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피곤하셨고, 배고프셨고, 아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몸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못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겪은 고통이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픈 몸, 지친 몸, 상처 입은 몸이 하나님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은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깁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기 몸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재하시는 소중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품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령은 우리 몸 안에 계십니다. 구원은 이 몸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친 어깨가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아픈 다리가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굳은살이 박힌 손마디가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그 몸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여러분의 몸을 축복하십시오. 너는 성령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그리고 그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를 몸과 영혼을 지난 생명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무거운 어깨가 하나님의 성소이며, 부어오른 다리와 굳은살 박힌 손마디가 곧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지성소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민의 험한 길을 걸어오며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해 온 주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남은 그 못 자국으로 우리의 지친 육신을 어루만져 주시고, 세상을 살아낼 새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내 몸이 소중하듯 고통받는 이웃의 몸을 귀히 여기게 하시고, 이번 한 주간 우리가 발 딛는 모든 곳에서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온전히 회복시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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