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내 맘에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가복음 18:9-14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13번째 시간으로 “다른 사람이 내 맘에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선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모든 선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선인지조차 알아채기 어려운 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실함”이라는 이름 아래 그어진, 의인과 죄인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장벽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그때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저 집사님처럼 기도하고 싶다, 저 권사님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이상하게도 방향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봅니다. 처음에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저 사람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은혜가 깊어질수록 긍휼과 사랑이 커져야 하는데, 오히려 판단의 칼날이 더 날카로워집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는 누구에게 들려주시기 위한 말씀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바리새인들이 그어놓은 ‘죄인’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가장 멸시받는 죄인의 대명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는 성경의 기록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자기가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자기 믿음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하려고 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여깁니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항상 함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가 같은 날, 같은 시간 성전을 찾아가 기도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상반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으며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던 신분이 높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라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죄인이라 여겨졌던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드린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리와 같지도 않다고 감사합니다. 게다가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얼핏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 그의 신앙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모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옆에 있는 세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올려보는 것이 아니라 세리를 내려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으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리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안도감을 얻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세리를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세리를 자신의 우월함을 돋보이게 할 ‘배경’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할 ‘소품’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함정입니다. 내가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허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의인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의인과 죄인의 깊은 선이 그어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잘못된 것은 그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율법의 규정 이상으로 금식했고, 십일조도 드렸습니다. 도덕적으로 흠잡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옆 사람 세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경건 훈련이나 봉사나 헌신 그 자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 아무리 좋은 종교적 영성이라도 독이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했다는 것이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율법에서 반드시 금식해야 한다고 명시한 날은 일 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이 두 날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 서는 날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퍼포먼스 즉 ‘과잉 경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바리새인이 보였던 ‘과잉 경건’의 모습이 종종 나타납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와 교인이 새벽기도 출석, 단기 선교 횟수, 교회 봉사를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과 비교하고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것을 내세워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날카로운 선을 긋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민 1세대 성도 중에는 정말 헌신적으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섬겨온 분들이 많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주일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헌신 자체는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랜 헌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데 왜 아직도 저 모양이지”, 또는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믿음이 깊은데”라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마치 처음엔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려 했던 베테랑 셰프와 같습니다. 처음에 더 맛있는 요리를 하는 일에 집착하다 정작 요리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냉혹한 미식 비평가로 변해버린 모습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은 세리는 도무지 상종하지 못할 죄인이라고 멀리 따로 떨어져서 기도합니다. 세리 역시 그런 바리새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성전 구석에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눈을 들었습니다. 세리는 눈을 들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공로를 나열했습니다. 세리는 가슴을 쳤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리의 기도에는 오직 하나님과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세리는 남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영적 파산 상태만을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섰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았습니다. 그에게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죄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상반된 기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눅18:14a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예수님은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모두가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여기고 심지어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세리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민족 반역자 친일파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생 율법을 지키며 민족의 자부심을 지켰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민족을 배신하고 로마 제국에 부역했던 세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은 그의 부역 행위가 정당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추악함을 깨닫고 자기는 죄인이라는 영적 파산 선고를 정직하게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자기 죄를 자복하고 엎드릴 때 주님의 긍휼이 임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남들이 못하는 헌금을 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서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연약함이, 교만한 경건보다 하나님께 훨씬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주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정직함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설 때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사람만이 비로소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 없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8:14b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의로워지는 길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파산 상태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리새인은 세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런 부정한 자는 성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맘에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내 기준 내 맘에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소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단독자입니다. 교회는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호회 같은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절실한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영적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에서 세리로의 전환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결심한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전환은 오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때만 가능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을 때 그가 처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임을 깨닫는 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옆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비교를 멈추고 자기의 숨겨진 내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그어놓은 의인과 죄인 사이의 선이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가 그은 선이 사라질 때, 그동안 밑으로 내려다보았던 그 사람이 비로소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형제자매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의 역설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수십 년간 교회와 신앙을 지켜온 우리의 믿음이 우리도 모른 사이 타인을 베는 칼날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두려움과 인정받고 싶은 외로움이 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들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홀로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어놓은 선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남을 판단하는 눈이 아니라 나를 보는 용기를 주시고, 정죄하던 손을 펴서 상처 입은 이웃을 보듬는 긍휼의 손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과 선을 긋는 자가 아니라 선을 지우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