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3-잔치 밖에 선 사람들

잔치 밖에 선 사람들

누가복음 15:11-32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시리즈 14번째 시간으로 잔치 밖에 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판단의 칼날도 날카로워지는 역설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의인이 되기 위해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함정,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의 맘에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내 기준에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인과 죄인으로 갈라놓는 정죄의 선이 어디로까지 이어지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비유는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초점을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 탕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비유가 전하려는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비유는 잃은 양과 동전과 아들로 상징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세 비유는 모두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오늘 살펴보는 비유의 말씀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탕자의 비유라고 하기보다는 두 아들의 비유또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야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밖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첫째 아들은 잔치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안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분노하며 스스로 잔치 밖에 섰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버지의 잔치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의 항변은 이렇습니다. “나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그런데 내 동생은 아버지 유산을 낭비하며 방탕하게 살았다. 그런데 왜 동생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가?” 여기에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정죄의 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동생을 죄인으로 분류하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아버지의 대우가 달라져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을 앞세워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문제는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 S. 루이스는 교만의 본질을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루이스에 따르면 교만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비교에서 자라납니다.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남보다 더 가졌는지가 중요해지는 순간 선이 그어집니다.


첫째 아들이 원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동생보다 낫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분노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설교에서 살펴보았던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은 구조입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 세리와 다릅니다.”


물론 첫째 아들의 충성은 진짜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아버지 곁을 지켰고,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충성 자체가 아닙니다. 그 충성이 어느 순간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는 우월감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경건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경건병이란 종교적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의무감과 공로 의식에서 비롯될 때 신앙이 병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가 하나님과 깊은 만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 헌금이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출하는 영적 이력서가 될 때, 신앙은 병들게 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선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의 선은 방탕함으로 그어지지만, 의인의 선은 경건함으로 그어집니다. 방탕함의 선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 허물어지기 쉽지만, 경건함으로 쌓은 선은 너무나 견고해서 예수님의 잔치 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리게 만듭니다.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잔치는 종종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22절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환대를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물론 누가복음 15장의 잔치와 마태복음 22장의 잔치가 정확히 같은 비유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잔치는 최소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 그리고 환영과 기쁨으로의 초대를 의미합니다. 만약 비유에서 언급하는 잔치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번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은 충성스러운 첫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31절에서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자기의 의로움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은, 그리고 때로 우리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합니다. 그 자처함이 잔치 밖에 서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은 첫째 아들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안았습니다. 그리고 잔치 밖에 서 있는 첫째 아들을 보고는 직접 나와 권했습니다. 15:28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당시 가부장적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나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수많은 하인과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잔치 자리에서 늙은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나가는 것은 권위와 체면을 내려놓는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위해서 먼저 찾아간 것처럼, 잔치 밖에서 분노하는 첫째 아들을 위해서도 먼저 아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가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531절입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아들을 찾아갔지만, 첫째 아들은 자기의 얄팍한 공로를 지키기 위해 기어이 아버지를 잔치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내려다보느라 자신을 위해 잔치 자리를 박차고 나오신 아버지의 그 눈물겨운 사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품으신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런 사람까지 받아들이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잔치 밖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왜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까? 아버지를 사랑해서였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기뻐서였습니까? 그의 말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닙니다. 계약의 언어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당신은 그만큼 해야 한다라는 철저한 계산입니다. 첫째 아들의 몸은 아버지 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어쩌면 집 밖으로 나간 동생을 부러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의무감으로 하는 신앙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비교만 있을 뿐입니다. 비교가 쌓이면 정죄가 됩니다. 그리고 정죄가 쌓이면 스스로를 잔치 밖에 서게 됩니다.


반면에 기쁨으로 하는 신앙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기쁨인 신앙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이미 내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둘러보셨습니다. 천국에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지옥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탄이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관대하셔서 지옥에 와야 할 사람들이 다 천국에 있습니다. 다시 심판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십계명을 기준으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가려내기 시작했습니다. 1계명, 2계명, 3계명계명이 하나씩 낭독될 때마다 사람들이 지옥으로 옮겨졌습니다. 4계명에 이르자 천국에는 오직 딱 한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다간 천국이 텅 비겠다며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을 다시 천국으로 부르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그 한 사람이 하나님, 안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계명을 어기며 흥청망청 살아갈 때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저의 모든 수고가 헛됩니다.” 항변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나머지 계명도 다 읽어라.” 이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사람 역시 십계명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7계명에 걸려서 지옥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천국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지옥으로 옮겨가고 말았답니다.


웃자고 만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엄중하기만 합니다. 인간의 기준과 율법으로는 천국은 텅 빌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계산서가 아닌, 세리와 죄인처럼 자격 없는 자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잔칫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잘하는 나의 신앙적 열심과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교우의 모습을 은밀히 비교하는 순간, 우리 손에는 이미 정죄의 돌멩이가 쥐어집니다. “저 집안이 갑자기 저렇게 큰 경제적 시련을 겪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긴 걸 보니, 분명 기도가 부족하거나 하나님 앞에 숨겨둔 죄가 있어서 그래.” 이렇게 수군거리는 순간, 그 정죄의 돌은 이미 손을 떠나 이웃의 가슴에 박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민 사회에서 교회는 단순한 예배 처소가 아닙니다. 거친 광야 같은 이방 땅에서 상처받은 나그네들이 모여드는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압니다. 이 땅에서 삶을 일구며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눈물겨운 일인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따뜻해야 할 그 쉼터가 정죄의 법정으로 변질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소외감과 영적 불안함을 교회 안에서 내가 저 사람보단 낫다는 영적 서열과 우월감으로 보상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과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것이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건함이 선이 되고, 그 선이 이웃을 배제하는 벽이 될 때, 우리는 몸은 예배당 안에 있어도 마음은 잔치 밖에 서 있는 첫째 아들이 됩니다.


오늘 비유에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결말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겼고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비유는 첫째 아들이 잔치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끝까지 밖에서 버텼는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의도적인 공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를 위한 공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잔치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밖에 서서 팔짱만 끼고 있습니까?


자신의 경건함을 앞세워 긋는 정죄의 선은 그것이 아무리 근거 있는 구별처럼 보여도, 결국 자신을 하나님의 잔치 밖에 세우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동안 잘 믿었으니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오라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며 나아올 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경건함으로 쌓은 정죄의 선은 예수님의 잔치 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리게 만듭니다. 정죄의 선을 허물 때, 비로소 잔치 안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결이 달라 묘하게 눈에 거스르는 사람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꼬고 있던 팔짱을 푸십시오. 그리고 먼저 한 걸음 다가가 따뜻한 인사를 건네십시오.


내 기준에 맞지 않아 맘에 들지 않는 교우가 있을 때, 비난의 말 대신 눈을 딱 감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단 1분이라도 축복의 기도를 심으십시오. 그것이 자격 없는 내가 조건 없이 초대받은 은혜의 잔치 안으로 내 발을 억지로라도 밀어 넣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믿음이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 우월감과 안도감을 얻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기 위해 몸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첫째 아들처럼,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정죄해 왔습니다. 잔치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 깨달음을 힘입어 선을 긋는 자가 아니라 선을 지우는 자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은혜받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잔치 자리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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