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5-손에 든 돌멩이가 무거워질 때

손에 든 돌멩이가 무거워질 때

요한복음 8:111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시리즈 15번째 시간으로 손에 든 돌멩이가 무거워질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번의 설교를 통해 종교적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정죄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죄인들을 정죄하고 그들과 선을 긋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교회와 교인이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부류나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 누군가를 정죄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죄하는 죄인이 더 나쁠수록, 내가 더 의로워진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죄의 선은 내가 정죄한 사람을 하나님의 잔치에서 쫓아내기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잔치 밖에 세웠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것을 뛰어넘으시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아침이 갑자기 깨집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여자를 군중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장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성을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간음은 혼자 저지르는 죄가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만 끌려왔습니까? 남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이 사건의 첫 번째 이상한 점입니다. 애당초 저들의 정죄에는 그 어떤 공정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데려온 자들의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그들의 목적은 율법을 어긴 여인을 심판하므로 율법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그저 그들의 계략을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여인을 끌고 온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을 자신들을 의롭게 보이게 만드는 도구로 삼았던 것처럼, 여인을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여인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을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 돌을 던질 권리를 주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의롭다는 확신이 들 때, 인간은 가장 잔인해집니다. 지금 그들의 손에 들린 돌멩이는 율법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추악한 위선을 감추기 위한 잔인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땅에다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8: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이 짧은 예수님의 한마디가 그 자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간음이 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간음을 죄라고 규정한 율법이 틀렸거나, 이제는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여인을 향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선언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 자리에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사실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이 손에 든 돌멩이는 율법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돌멩이는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을 더 나쁜 죄인으로 만들면,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사람 즉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한마디가 그들의 위선을 정면으로 드러내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 말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중요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은 나이 많은 자부터 나갔다고 증언합니다.


왜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나갔을까요? 살아온 세월만큼 죄의 기억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자신이 지은 죄의 목록이 더 깁니다. 젊어서 저지른 일들, 숨겨둔 일들, 비록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만 아는 일들, 그 기억들이 예수님의 한마디 앞에서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 떨렸을 것입니다. 들었던 돌이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나갔습니다.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으셨던 분만 남으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분만이 정죄와 심판의 돌을 던질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죄와 심판의 돌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현장을 떠나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8:10b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8:11b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용서가 먼저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용서의 선포 다음에 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요청은 정죄 위에서가 아니라 용서 위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죄를 직면하게 하시되,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직면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먼저 죄를 지적하고, 변화를 요구한 다음에야 용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가 먼저였고,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게 되면, 복음은 곧바로 율법이 되고 맙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죄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죄인을 나쁜 일을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의 크기를 재고, 내 죄는 작고 남의 죄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정죄하고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죄인은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인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죄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 됩니다. 죄인은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가장 먼저 사랑이 닿아야 할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깊이 통하는 역설적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라는 귀족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스스로 점잖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갔다가 피고석에 앉아 있는 살인 혐의를 받는 여인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여인은 그가 젊었을 때 유혹하고 버린 여인이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으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의인의 자리에 앉아 그녀를 심판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역설 앞에서 그는 타인을 정죄하는 인간의 위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소설의 제목이 부활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신이 의인이라는 환상이 깨지고 참된 죄인임을 직면하는 순간, 그에게 진짜 영적 부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8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경험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손에 든 돌을 내려놓으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거짓된 환상이 깨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에게도 진짜 신앙이 시작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비난의 돌멩이입니까? 정죄의 돌멩이입니까? 아니면 오래도록 쌓아온 분노의 돌멩이입니까?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군중의 일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죄나 실패를 보면서 속으로 "나는 저렇지 않다"며 안도합니다. 그 안도감이 돌멩이를 쥐게 만듭니다.


고달픈 이민 생활로 인해 상처받은 이민자들의 피난처여야 할 이민 교회가, 너무나 자주 자신의 종교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차가운 법정으로 변하곤 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신앙의 모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정죄하는 순간, 혹은 큰 시련을 겪는 교우를 향해 기도가 부족하거나 숨겨둔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수군거리는 순간, 우리의 손에는 이미 정죄의 돌멩이가 쥐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향해 던지려고 손에 든 돌멩이가 무거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이 나를 바라보실 때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이 말씀 앞에서 내 손에 든 돌멩이가 갑자기 무거워집니다. 그 엄중한 음성을 대면하는 순간, 나이 많은 자부터 현장을 떠났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수록 그 무게를 더 먼저 그리고 더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자신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이런 통찰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진정한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로부터 타인을 치유하는 힘을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파본 사람만이 남의 아픔에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깨닫는 사람만이 다른 죄인에게 정죄 없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의인의 가면을 쓴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용서와 치유의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지난주 살펴본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경건함으로 자기의 동생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선을 그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을 긋는 것에서 더 나아가 돌멩이를 들었습니다. 선을 긋는 것과 돌을 드는 것은 같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은 선 앞에서 서서 물으십니다. “너는 정말 그 선 안쪽에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인은 단순히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손에 든 돌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앙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 실패를 고백해도 무시당하지 않는 공동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도 환영받는 공동체,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우려 하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의인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그날, 예수님은 정죄 대신 새로운 시작을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보다 더 크신 은혜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을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이 주는 은혜와 용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받은 주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정죄 대신 긍휼을, 돌멩이 대신 용서를, 선 긋기 대신 선 지우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판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잠깐 멈추십시오. 내 손에 든 돌멩이를 조용히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를 보셨던 그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선을 긋는 자가 아니라 선을 지우는 자로,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치유하고 치유받는 자로, 아름답고 존귀한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죄인을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손에 든 돌멩이를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언제부터 저 돌을 들었는지도 잊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라는 예수님 말씀 앞에 우리 손에 든 돌멩이를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기억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 겸손이 우리를 긍휼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의인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함께 모이는 병원이 되게 하옵소서. 서로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함께 품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정죄 대신 새 출발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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