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망대 아래서 만나는 복음
욥기 4:7-8, 누가복음 13:1–5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16번째 시간으로 “무너진 망대 아래서 만나는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손에 든 돌멩이를 내려놓았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들이 내려놓은 돌멩이는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우월감의 돌멩이였으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심판하는 정죄의 돌멩이였습니다.
그런데 정죄의 돌멩이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에 그은 왜곡된 종교적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정죄의 선 못지않게 많은 교인이 마음에 그어놓은 종교적 선은 바로 성공과 실패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나누는 선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성공한 사람에게는 축복의 선을 긋고 실패하거나 재앙을 겪는 사람에게는 저주의 선을 긋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은 세상보다 교회 안에서 더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잘되면 복 받은 사람이고, 안되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사업이 잘되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실패하면 기도가 부족한 것이라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고, 자녀가 방황하면 부모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성공을 축복의 증거로, 실패를 믿음 부족의 결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것이 축복과 저주의 선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은 정죄의 선보다 훨씬 더 교묘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믿음의 결과라는 말 뒤에 숨어 있기에 이것이 차별적인 선인지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삶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를 믿음의 결과로 연결하는 순간, 우리는 매우 위험한 차별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성공과 부로 하나님의 축복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 논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까지 잃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욥이 겪는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라고 단정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4:7-8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주장은 단순하고 매력적입니다. 고난은 죄의 결과이고, 복은 의로움의 결과입니다. 욥이 이토록 고난을 받는다면 반드시 숨겨진 죄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친구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맞기도 합니다. 죄의 결과로 고난이 오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이고 보편적 법칙으로 누구에게나 적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이나 고난에 이러한 잣대를 들이밀 때, 이러한 주장은 재앙을 겪거나 고난받는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재앙과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준 것은 그가 겪는 재앙이나 고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이유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친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난을 위로하러 왔다가 오히려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준 것입니다.
니컬러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25살의 아들을 등반 사고로 잃은 뒤 1년간 겪은 깊은 슬픔과 신앙적 고뇌를 정직하게 담아낸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고난받는 자에게 가장 상처가 된 것은 고난 그 자체보다도 내 고난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의 확신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누군가 겪는 재앙이나 고난을 보면 우리는 두려워집니다. “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라는 사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하려 합니다. “저 사람은 뭔가 잘못했을 거야.” “나는 저렇게 살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그 순간 타인의 고난은 나를 안심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의 잔인함입니다.
이민 사회에서 부와 성공을 바라는 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도 문화도 다른 환경을 뚫고 삶을 일구어야 하는 이민자에게 부와 성공은 그 자체로 생존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이민 교회 안에서 성공에 대한 열망은 더 강렬하고, 그 열망이 종교적 언어와 결합할 때 번영신학은 더 강력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녀가 명문 대학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가게가 잘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가게가 문을 닫으면, 자녀가 힘든 길을 걸으면, 몸이 아프면 어떻게 됩니까? 번영신학이나 인과응보의 신앙에서 사업의 실패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됩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이 만드는 가장 큰 비극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가장 교회가 필요한 사람이, 고난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숨기고, 아픔을 감추고, 괜찮은 척하며 예배당에 앉아 있다가 결국 떠나게 됩니다. 가장 따뜻해야 할 공동체가 가장 드러내기 두려운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신앙은 대부분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주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뒤집어 놓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닌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재앙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저 사람들은 뭔가 잘못이 있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라는 종교적 확신이 저들의 질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리하여 선을 그으려는 잔인한 시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눅13:2–3a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그리고 이어서실로암 망대 사건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눅13:4-5a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아니라.”
예수님은 비극적인 두 재앙에 대해 “아니라”라는 대답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도, 망대에 깔린 열여덟 명에 대해서도 똑같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니라”라는 선언에서만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건 모두에 대해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는 엄중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회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인 잘못을 반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은근슬쩍 나의 안전과 의로움을 챙기던 잔인한 종교적 공식, 즉 인과응보의 세계관에서 생각을 돌이키라는 선언입니다. 타인이 겪는 예상치 못한 재앙을 자신의 안전과 보호를 정당화하는 잣대로 삼으려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영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는 단호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비극적인 재앙에 대한 영적 이유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가 아니라는 사실만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재앙에 대한 영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더 중요하게 여기신 문제는 다른 사람의 재앙이나 고난을 하나님의 저주나 죄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잘못된 신앙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설명을 원합니다. 누군가 성공하면 이유를 찾고, 누군가 실패하면 원인을 찾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통제 가능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과 재앙에 이유를 붙여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야 내 삶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인간이 만든 인과응보 공식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실로암 망대는 죄인을 골라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망대는 누구에게나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인을 분석하는 재판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을 축복의 증거처럼 포장하는 순간, 우리는 실패한 사람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은 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몸이 아픈 것만으로도 이미 힘듭니다. 사업이 무너진 것만으로도 이미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영적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믿음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영적 차별이 더해지면서 육체의 고통 위에 영적 수치심이 쌓입니다.
반면에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이 믿음의 증거라는 착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이 착각은 서서히 교만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교만은 고난받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선 안쪽에 있다는 안도감이 선 바깥쪽 사람을 내려다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착각은 매우 위험한 순간을 만듭니다. 성공의 선 안쪽에 있던 사람에게 재앙이나 고난이 찾아올 때입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으로는 자신이 겪는 재앙이나 고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기도가 모자라서도 아닌데 망대가 무너집니다. 그 순간 신앙이 흔들립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과 저주의 선은 모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이 선으로 인해 고난받는 사람은 수치심 속에 아픔을 감추고 침묵할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우월감 속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집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은혜의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심판대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욥기는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욥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욥은 끈질기게 하나님께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한 답을 요구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신이 의롭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에게 폭풍 같은 질문을 퍼붓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겪는 고난에 대한 답 대신 그에게 나타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을 회복시킨 것은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겪는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임재의 신비”가 욥을 살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너진 망대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우리는 모두 연약합니다. 오늘 웃고 있어도 내일은 울 수 있습니다. 오늘 건강해도 내일은 병상에 누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성공해도 내일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은 자랑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실패가 저주의 이유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불의의 재앙을 겪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보다 그들의 곁에 앉으셨습니다. 복음은 재앙이나 고난의 이유를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은 정죄의 선보다 더 교묘하고 더 깊이 우리 안에 박혀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기에 이것이 잘못된 차별의 선인지조차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축복과 저주의 선을 그으며 살아가면, 우리는 타인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선을 허물 때만 비로소 고난 겪는 형제의 진짜 아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 아래에서 인간이 만든 축복과 저주의 선을 허무셨습니다. 타인의 무너짐 앞에서 재판관이 되지 마십시오. 이유를 분석하며 선을 긋지 마십시오. 대신 함께 울어주십시오. 함께 앉아주십시오. 함께 짐을 져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폭풍 속에서 욥을 찾아와 주셨듯, 무너진 실로암 망대 아래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울고 있는 사람들 옆에 예수님이 서 계셨듯 우리 역시 이웃의 무너진 삶 곁에 함께 앉아야 합니다. 고난을 겪는 이웃을 만난다면 성급한 위로나 조언을 건네기 전에 그저 손을 한번 꽉 잡아주십시오. 고난받는 이웃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가 아니라 “지금 많이 힘드시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정죄보다 긍휼을, 분석보다 공감을, 우월감보다 연대를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공한 사람들의 전시장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들이 서로를 붙들어 주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난을 겪는 자의 곁에 서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실패한 사람을 판단하며 살아왔습니다. 누군가 무너지면 이유를 찾으려 했고, 그 이유를 통해 나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무너진 망대 아래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임을 고백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설명하려 하지 말게 하시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공을 자랑으로 삼지 말게 하시고, 실패를 수치로 여기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성공을 자랑하고 전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무너진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