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7-그가 서 계신 자리

그가 서 계신 자리

요한복음 9:114, 35-38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9: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9: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9: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9: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9: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시리즈 17번째 시간으로 그가 서 계신 자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 건강과 재앙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나누는 우리 안의 깊은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공과 부와 건강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고 재앙과 질병과 가난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는 것은, 욥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어 온 우리의 고질적인 오해입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우리는 재앙을 겪거나 고난받는 사람을 볼 때마다 위로하기보다 고난의 원인이나 이유를 먼저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이 재앙을 겪는 사람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고난받는 사람에게는 무슨 죄가 있는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한 탓이라 너무도 쉽게 단정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나 고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동방 최고의 의인이라는 욥이 극심한 재앙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욥의 친구들마저 그가 겪는 재앙과 고난을 보고는 그에게 남들에게 숨긴 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런 재앙과 고난을 겪을 수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욥이 겪는 재앙과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참변을 당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불의의 사고나 재앙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남들보다 더 큰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재앙이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재앙이나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난 앞에서 어디에 서 계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분이 서 계셨던 그 자리가 오늘 우리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9:2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제자들의 질문은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늘 하는 질문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는 고난 앞에서 자꾸 이유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이유를 찾으면 안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저런 일을 당한 거야.” 그러면서 자신은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 자체를 바꾸십니다. 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과거의 질문을 이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것인가라는 현재와 미래의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사람을 일부러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저 사람이 겪는 고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절망으로 가득 찬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실 수 있다는 위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시고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 장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을 굽히셨습니다. 땅에 손을 대셨습니다. 진흙을 반죽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죽한 진흙을 그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번거롭게 굳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이 사람은 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전을 던졌을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을 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것은 단순한 치유의 방법이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난받는 사람 곁에 서는 것은 말보다 몸의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를 설명하기보다, 그 사람의 고통 앞에 몸을 굽히시고 그의 병든 몸을 손수 만지셨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맹인 주위에 그어 놓은 축복과 저주의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고난을 해설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몸을 낮추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헨리 나우웬은 자신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치유자는 멀리서 처방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 곁에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굽히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멀리서 진단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몸소 만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겪는 사람 앞에서 말을 너무 빨리 꺼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거예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 앞에서 너무 성급한 설명은 때로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상처를 더 아프고 힘들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맹인이 실로암 못에 가서 예수님이 눈에 발라주신 진흙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 돌아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눈을 뜨게 된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 뜬 사람을 데려다가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에 진흙을 이겼으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그의 부모를 데려다가 심문합니다. 그리고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 준 예수님과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사람 모두를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눈을 뜨게 된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쫓아냅니다. 9:34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내었더라" 비록 육신의 눈은 떴지만, 평생을 함께했던 신앙 공동체와 이웃으로부터 완벽하게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맹인으로 살 때는 성전 밖 구석에 앉아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눈을 뜨고 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문받고 공동체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고난의 모양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선 밖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뜬 사람이 유대 종교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즉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너무 아름답고도 아픕니다. 사람들은 기적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상처 입은 사람 곁에는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을 치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쫓겨난 자리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9장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의 이야기를 무려 41절에 걸쳐 대단히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한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겪는 이 모든 고난에 대해 그 어떤 원인이나 이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하신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고난을 겪는 그 사람 곁에 계셨습니다.


C. S. 루이스는 암에 걸린 자기의 아내를 떠나보낸 후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아내를 떠나보내고 큰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 자신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준 친구를 소개합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그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고 말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대한 설명보다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는 하지만 곁에는 가지 않습니다. 말씀은 전하지만 함께 울지는 않습니다. 위로의 문장은 보내지만, 정작 그 사람 집 문 앞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복음은 멀찍이서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제자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고난의 원인을 찾아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는 자리입니다. 선을 긋는 자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이것은 이 사람의 고난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기도가 모자라거나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다.” 설명하고 분석하고 심문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거기에 있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고난 곁에 서는 방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고난받는 사람 곁에 함께 서는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 답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민의 삶 속에서 드러납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 곁에 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민 생활에서 고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는데 몸까지 아픕니다. 자녀가 힘들어지는데 부부 사이도 흔들립니다. 고난의 모양이 계속 바뀝니다. 눈을 뜨고도 쫓겨난 그 사람처럼, 한 가지 고난이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쫓겨난 자리까지 찾아가셨습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오늘 우리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눈먼 사람을 찾아가신 것처럼, 쫓겨난 사람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기꺼이 고난받는 이웃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기도 제목을 묻기 전에 먼저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구절을 찾기 전에 먼저 손을 잡으십시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진흙을 개어 아픈 눈에 발라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도 그 사람 곁에 계셨습니다. 고난이 해결된 것처럼 보일 때도, 새로운 고난이 시작될 때도, 예수님은 그를 주시하셨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 번 방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곁에 머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머무신 자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두 주간에 걸쳐 우리는 수천 년간 계속되고 있는 축복과 저주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고난받는 사람을 죄인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설명보다 함께 계심을 선택하셨습니다. 분석보다 동행을 선택하셨습니다. 정답보다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변에 재앙이나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를 묻지 마십시오. 먼저 그 자리로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자리로 함께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깊숙이 그어져 있는 축복과 저주의 선을 허무는 가장 강력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지금 남들이 모르는 고난이나 역경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요한복음 9장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쫓겨난 자리에서도 그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역경의 곁에 계십니다. 아무 답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그 어떤 원인도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그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신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문제로 취급받던 그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한 사람으로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축복과 저주의 선을 긋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선을 허무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서 계신 그 자리에 함께 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난당하는 자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서 계신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함께 서 계신 곳은 성공한 자들의 무대가 아니라, 쫓겨난 사람의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그 자리로 가게 하옵소서. 고난받는 이웃 앞에서 이유를 설명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대신 몸을 굽혀 그 곁에 앉는 용기를 주옵소서. 지금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설명하지 않으셔도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모인 교우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물질을 구별하여 봉헌한 손길 위에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또한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선 밖에 있는 사람 곁으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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