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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야 할 길5-균형은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이 아닙니다(사람을 살리는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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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야 할 길5-균형은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이 아닙니다(사람을 살리는 균형)

마가복음 3:1-6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막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막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막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막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함께 가야 할 길" 시리즈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균형은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깨달음과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낡은 지도를 고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 지도가 틀렸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 존재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목사님, 그 주장은 틀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제 지도를 고치기 전에 그 말을 한 사람부터 고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옳은 것을 안다고 해서 어떻게 행동할지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스캇 펙은《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생은 힘들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숙한 인생을 살기 위한 네 가지 훈련을 제시합니다. 1)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것, 2) 책임을 지는 것, 3) 진실에 헌신하는 것, 4) 그리고 마지막으로 균형 잡기입니다. 오늘은 스캇 펙이 제시하는 성숙을 위한 마지막 훈련인 균형 잡기에 대해 말씀을 나눕니다.

성숙한 삶을 위해선 즐거움을 미룰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기쁨을 평생 뒤로 미루며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자기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몫까지 대신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사실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을 함부로 찔러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훈련이라도 언제, 어떻게 할지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균형 잡기가 필요합니다.

치킨은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주문하면 모두가 만족합니다. 중국식당에 가서 짜장면 짬뽕 사이에서 고민이 되면 짬짜면을 주문하면 됩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반반 섞거나 딱 중간에 선다고 균형이 잡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침묵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스캇 펙이 말하는 균형 잡기는 익숙한 반응에 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필요한 반응을 선택하는 훈련입니다.

스캇 펙은 균형 잡기를 설명하면서 분노를 예로 듭니다. 분노 앞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익숙한 반응에 붙들려 살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화가 났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던 식탁이었습니까? 교회 주차장이었습니까? 아니면 부부끼리 여행했을 때였습니까? 우리는 화가 나면 다 쏟아내거나, 다 삼키는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우리는 화를 다루는 데 대단히 서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는 뒤끝이 없어"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자기의 분노를 다 쏟아냅니다. 물론 본인에게는 뒤끝이 없을 수 있습니다. 뒤처리를 남은 사람들이 하니까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화가 났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합니다. 관계가 깨질까 봐, 나쁜 사람이 될까 봐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화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늘 웃는 사람을 믿음 좋은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나 분노가 없는 얼굴과 평화로운 마음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닙니다. 참아야 할 자리에서 쏟아낼 수도 있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어떤 반응이 사람을 살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말하고 언제 멈추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는 분노하시는 예수님과 침묵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분노와 사람들의 침묵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며, 사람을 살리는 균형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3: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그런데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면 이것으로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 "막 3: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려는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막 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이 주목할 수 있도록 한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막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그들은 입을 닫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은 열심히 찾으면서도, 눈앞의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안식일이니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 다음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치면 안 됩니까?" 규정도 지키고 사람도 고치는, 마치 반반의 타협을 이룬 균형 잡힌 지혜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발할 구실을 찾는 이들 앞에서도, 그 사람의 회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사람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막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을 위해 주신 날에,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규정 때문에 기다리게 한다면 우리는 안식일이 지켜야 할 사람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균형을 배우려면 내 방식이 옳다고 고집하기 전에, 그 방식이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탄식하시며 분노하십니다. 막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하지만 예수님은 탄식과 분노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굳은 마음을 향한 분노 속에서도, 눈앞의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균형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는 현실 앞에서 슬퍼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화가 났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분노를 안고, 지금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고, 그에 맞는 행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다음 장면은 더 충격적입니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서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의논합니다.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 왕가를 지지하던 이들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탄식하고 분노하신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반면에 잠잠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했습니다. 조용하고 점잖은 목소리가 선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분노한다고 해서 그 분노가 항상 정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노와 침묵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도 화를 내셨으니 내 화도 의롭다"라고 자기의 분노를 함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화가 난다는 사실과 그 화로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분노 가운데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그 감정을 안고도 지금 사람을 살릴 말과 행동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을, 부당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입을 다물라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때로 균형 또는 중립이라는 말을 앞세워 피해자의 입을 막아 왔습니다. "말씀은 맞는데 말투가 문제입니다." "화내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문제는 그대로 둡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사람이 정작 그 잘못에는 답하지 않고 상대의 말투만 꼬투리 삼는다면, 그것은 책임을 피하는 교묘한 기술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굳은 마음 앞에서도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일로 자신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길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십자가로 이어졌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새 생명을 의지하여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린 뒤에야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회당의 손 마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시고, 그를 한가운데 세워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이전과는 다른 반응과 선택을 배워 갑니다.

인생과 신앙의 균형을 잡으려면 내가 익숙하게 의지해 온 반응 방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늘 이기려던 사람은 마지막 말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늘 분노를 삼키기만 하던 사람은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아야 관계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게 편한 반응이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반응은 아닙니다.

이 훈련은 우리의 다음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지금 화가 난 대로 말하면 상대를 모욕하거나 짓밟을 것 같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반대로 침묵하는 동안 누군가 계속 다치고 있다면 입을 열고 그 사람의 곁에 서야 합니다. 상황은 달라졌는데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습관만을 따르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설교에서 정의를 말하는 일과 교회 안에서 불편한 말을 실제로 듣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누군가 제 말이나 결정을 비판할 때, 그 비판에 일리가 있는지 살피기도 전에 그 사람의 태도부터 문제 삼고 싶어진다면 저 역시 낡은 지도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저부터 새로운 반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한 성격이라는 말로 화를 쏟아낸 뒤, 상처받은 가족에게 빨리 괜찮아지라고 요구하지 맙시다. 우리는 화낼 때는 전광석화인데, 사과할 때만 대단히 신중해집니다. 균형은 상대가 적당히 참아 주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남긴 상처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다음에는 다른 말과 행동을 선택하는 데서 자랍니다.

한편 오랫동안 화를 표현하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다. 거절하면 관계가 깨질까 봐, 그리스도인이 왜 그러느냐는 말을 들을까 봐 참습니다. 특별히 폭력을 겪은 사람에게 "참고 견디는 것이 십자가"라며 고통을 덮게 한 교회의 가르침은 당장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들이밀며 피해자를 폭력의 자리에 방치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억울함으로 인해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분노는 짓밟히지 말아야 할 존재가 짓밟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킬 행동을 찾는 일입니다. "여기서 멈추십시오"라고 말하고, 도움을 구하고, 안전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도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번 주에 화가 날 때나, 또는 참을지 말할지 망설여질 때가 있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스스로 물어봅시다.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나는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지금 내 반응은 누구를 살리는가?" 혹시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았다면 "그 말이 저를 무시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무슨 뜻이었습니까?"라고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상대의 뜻을 확인하면서, 그 말이 내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도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균형은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익숙하게 해 오던 반응이나 선택을 내려놓는 의도적인 훈련입니다. 분노를 삼키기만 하던 사람에게는 말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분노를 쏟아내던 사람에게는 멈출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훈련은 분노를 다룰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을 누리거나 미룰 때도, 책임을 맡거나 내려놓을 때도, 진실을 받아들이고 언제 어떻게 말할지 결정할 때도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선택은 사람을 살리는가?"

회당에서 분노하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하지만 회당에서 잠잠하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죽일 일을 의논했습니다. 균형은 기계적으로 양념 반, 프라이드 반처럼 양쪽을 절반씩 챙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균형은 우리의 익숙한 반응을 넘어, 사람을 살리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신 주님의 은혜와 말씀을 힘입어, 멈추어야 할 때 멈추고 나서야 할 때 나서며 사람을 살리는 균형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을 한가운데 세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내 체면이 상할 때는 쉽게 화를 내면서, 이웃의 아픔 앞에서는 조용한 교회를 지키려 했습니다. 상처를 준 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용기를 주옵소서. 내 체면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을 짓밟지 않게 하시고, 나와 이웃의 존엄이 짓밟힐 때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모욕을 쏟으려는 입은 멈추게 하시고, 진실을 막으려는 침묵은 깨뜨리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굳어진 반응을 새롭게 하셔서,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며, 사람을 살리는 행동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마른 손을 회복시키시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