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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야 할 길6-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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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야 할 길6-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요한일서 3:16-18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함께 가야 할 길 시리즈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스캇 펙이 제시한 성숙을 위한 네 가지 훈련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즐거움을 미루는 것, 자기 몫의 책임을 지는 것, 진실 앞에서 낡은 지도를 고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익숙한 반응을 바꾸는 균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한 훈련을 해야 합니까? 내 생각대로 살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만 지내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익숙한 내 방식까지 고치면서 이전보다 더 성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스캇 펙은 자신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네 가지 훈련을 설명한 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 불편한 훈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계속하게 하는 힘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책임을 감당하고, 듣기 싫은 진실도 듣습니다. 사랑하기에 늘 해 오던 방식도 고칩니다.

그렇다면 이 불편한 훈련을 계속하게 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물론 사랑은 너무나 크고 신비로워서 사람의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불편해지는 날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느낌으로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보면 마음이 설레고, 함께 있으면 행복하며,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을 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감정은 정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마치 시애틀의 날씨와 같습니다. 햇살이 비치다가 구름이 오고, 따뜻하다가 차가워집니다. 오랜 관계에는 처음의 설렘만으로 건너기 어려운 날들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스캇 펙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과 구별합니다. 그는 사랑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신을 넓혀 가려는 의지라고 규정합니다. 쉽게 말하면, 나와 다른 사람이 더 성숙하게 살아가도록 내 시간과 마음을 내어 주고, 실제로 돕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내 일정만 중요하던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내 경험만 옳다고 믿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내 세상에 그 사람의 사정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스캇 펙의 사랑에 대한 정의에는 자신의 성장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히 여기듯, 하나님께 사랑받는 나 자신도 소중히 돌보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돌보는 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스캇 펙이 말하는 의지는 사랑하고자 하는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선택입니다. 가령 "아이 이야기를 좀 들어 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자녀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줄 때, 그 마음은 비로소 자녀가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을 배우는 일은 우리의 시간과 행동을 바꾸는 일입니다.

그런데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저 사람이 밉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가식이고 위선 아닙니까?" 미운 마음이 남아 있어도 상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마음이 상했어도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소문을 보태지 않는 것 역시 사랑의 선택입니다. 마음이 당장 풀리지 않는 것과 상대가 망하기를 바라며 미움을 키우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없는 친밀함을 연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감정이 내 행동의 전부를 결정하게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거나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어도,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원수가 배고프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원수를 감정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지켜 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없애야 할 적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과 분노를 살펴보았습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탄식이나 분노, 이웃의 아픔을 보고 느끼는 연민은 사랑으로 나아가는 힘이 됩니다. 따뜻한 마음이 함께하면 기쁘게 사랑하고,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날에도 사람의 존엄과 필요에 응답하는 법을 배워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마음이 없을 때도 이웃을 사랑할 힘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겠다는 내 의지나 결심만으로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일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일서 3:16a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이것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순서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사랑을 알고 배우게 되었습니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에게서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내 기분이나 선한 의도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스캇 펙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영적 성장을 위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초점을 둡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의 근거와 기준을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그 사랑에 비추어 보면, 영적 성장은 단순히 더 유능해지고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의 존엄을 지키며,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장이 사랑받을 자격을 심사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갈수록 부모님의 기억이 흐려지고 돌봄이 더 많이 필요해진다고 해서 부모님의 존귀함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회복이 더디고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 주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의 사랑 밖으로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완성하는 일이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이 사랑의 시작을 다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는 잘 사랑한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배워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랑받을 자격을 쌓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도록 배우는 일입니다.

주님께 먼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16절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16b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는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는 특별한 상황에서 감당해야 할 엄청난 희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목숨까지 내주는 사랑을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요한일서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 우리를 살리셨듯이, 우리도 내 삶을 지탱하는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은 눈앞의 궁핍한 형제에게 마음을 열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민 생활에서는 일자리를 잃으면 월세와 식비 걱정이 함께 밀려옵니다. 그런 교우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번 주 먹을 것은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내게 도울 여력이 있다면 무엇을 나눌지 결정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우면 교회가 함께 감당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 임금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당장의 식사를 돕는 일과 함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받아야 할 임금을 받을 길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그것도 사랑입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한 그 사람이 오늘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쉬며,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어지는 18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한다는 입술의 고백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사랑과 살아가는 사랑이 만나야 합니다.

오래 걸어 밑창이 닳은 신발을 생각해 보십시오. 맨질맨질하게 닳은 밑창에는 그 신발을 신고 걸었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남길 수 없는 흔적이 있습니다. 아픈 배우자와 병원에 다녀온 길, 서먹해진 자녀와 다시 대화하려고 나란히 걸었던 길, 누군가에게 음식을 전하러 갔던 길이 우리 사랑의 발자국이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수고를 많이 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에게 필요한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외면한 채, 내가 해 주고 싶은 것만 해 주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돕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실제로 필요한 도움에 맞추어 내 행동도 바꾸어야 합니다.

물론 사랑한다고 상대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위해 기다려 줄 때도 있고, 잘못된 행동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배운 균형 잡기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상대를 기쁘게 하는 행동인지와 그 사람을 살리는 행동인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폭력과 차별을 참으라고 하면서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이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앞세워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주님을 따르는 교회는 피해자에게 더 참으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사람의 곁에 서서 안전과 존엄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루아침에 배우지 못합니다. 마음은 앞서지만, 행동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해 보려다가 다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랑을 다시 배웁니다. 성령께서는 이웃의 아픔을 더 깊이 느끼도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우리의 선택을 도우십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주변에서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인지, 조금 서먹한 사람인지에 따라 도움의 필요까지 다르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대화할 수 있다면 "요즘 제가 어떻게 함께해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어봅시다.

대답을 들은 뒤에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 한 가지를 함께 정해 실천해 봅시다. 시간이나 물질을 나누어야 한다면 구체적으로 정하십시오. 우리 교회도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위해 누가, 언제, 무엇을 함께 감당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사랑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한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사랑을 미룰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날에는 그 기쁨으로 사랑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날에도 사람의 존엄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내 시간과 관심에 이웃의 자리를 마련하고, 눈앞의 필요에 내가 가진 것으로 응답하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다시 배우는 것이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말의 온도보다 발의 방향으로 드러납니다. 이번 주 우리의 발걸음은 누구를 향하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웃의 삶을 돌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시간과 생활은 바꾸려 하지 않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모른 척 외면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새롭게 하셔서, 감정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행동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열고, 우리 손에 맡기신 것을 궁핍한 이웃과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 자유교회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살려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고된 일상 가운데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 성도들을 축복해 주옵소서. 주님 앞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맡기오니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힘과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땀과 눈물이 담긴 삶의 열매를 예물로 구별하여 드립니다. 정성껏 봉헌한 손길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안을 가득 채워 주옵소서. 또한 드려진 예물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아름답고 소중하게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도 삶의 무거운 짐과 아픔으로 인해 각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