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야 할 길7-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만 사랑입니까?
시편 131:1-3
시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함께 가야 할 길 시리즈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만 사랑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세미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사랑을 좋아하는 감정으로만 여기는 오해를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따뜻한 감정도 사랑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이웃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런 사랑을 배워 갑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오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당신 없인 못 살아. 정말 나는 못 살아”(홍진영 사랑의 배터리),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패티김 그대 없이는 못 살아) 참으로 애틋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관계를 건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 없이는 못 산다는 고백이 “그러니 당신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해”라는 요구로 이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상대는 사랑받는 기쁨보다 한 사람의 행복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중대한 오해로 의존성을 사랑과 혼동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상대가 계속 나를 돌봐 주고,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확인해 주어야만 안심하는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나 지치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습니다. 문제는 그 바람이 너무 커져, 상대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는지보다 지금 나를 얼마나 채워 주는지만 중요해질 때입니다.
스캇 펙이 말하는 사랑의 목적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앞세워 상대가 자기 계획을 바꾸어서라도 언제나 내 요구를 먼저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내 필요를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그 사람의 삶을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가령 배우자가 오늘은 너무 지쳐서 잠시 쉬고 싶다고 말합니다.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나는 서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지금 내 기분을 풀어 줘야지”라고 한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려다가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형편을 놓치게 됩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돌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관심을 주지 않고 “네 행복은 네 책임이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서로를 돌보는 책임을 넘어, 내 마음의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특별히 이민 생활에서는 이런 기대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쉽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친구와 형제, 이웃과 나누던 이야기를 이제는 배우자 한 사람에게만 합니다. 영어가 서투르다 보니 자녀에게 자주 도움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처음 마음을 열게 된 한 사람에게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많이 의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미성숙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병원에 갈 때 동행이 필요한 분도 있고, 일상생활에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분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한 분도 있습니다. 이런 상실의 슬픔을 두고 사랑이 아니라 의존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도움이 필요할 때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랑의 책임입니다.
다만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 사람이 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필요를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존중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31편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는 매달리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인의 고백은 삶의 책임을 포기하거나 부당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어야 한다는 교만을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배우자는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녀는 내 인생의 모든 아쉬움을 만회해 줄 수 없습니다. 목사도 교우의 모든 질문에 답하고 모든 상처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만, 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몫도 있습니다. 이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의 부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시편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아이는 젖을 뗐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품에 있습니다.
이 아이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 아이가 아닙니다. 여전히 돌봄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달라진 것은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젖을 먹지 않아도 어머니의 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젖을 떼었다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을 배우는 시인의 마음을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우리의 관계에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장 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물 수 있는가? 상대가 지금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도 그 사람의 사랑 전체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배우자가 오늘은 지쳐서 대화를 미루자고 할 때, 서운한 마음을 말하면서도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다시 정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전화를 바로 받지 못했을 때, 내가 덜 소중해졌다고 단정하지 맙시다. 자녀에게도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며 답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필요를 말하면서 상대의 사정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는 법을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의 바쁜 사정이나 피곤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서운한 마음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자꾸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런 마음을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두려운지 정직하게 알아차리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을 다 해결한 뒤에야 품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상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으려던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시편 131편의 마지막 3절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초대합니다. “시편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혼자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결심으로 시가 끝나지 않습니다. 시인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관계에도 비추어 봅시다. 내가 의지하는 배우자와 자녀와 교우도 나와 함께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지치고,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구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손길을 통해서도 우리를 돌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며, 내 필요와 상대의 한계를 함께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오늘 배우자의 기분 하나로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녀가 내 희생을 몰라주거나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 인생의 가치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함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박해 때문에 데살로니가를 서둘러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성도들은 환난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사랑을 잘 지키며 바울을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만 그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을 걱정하며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극심한 궁핍과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사도 바울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을 다시 살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기를 그리워한다는 소식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살아갈 힘을 준 것은 성도들이 주 안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상대가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만 살피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과 그 사람에게 내 행복의 모든 책임을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때로는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의존의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계속 필요로 해야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굳게 서서 성장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관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허전할 수 있습니다. 돌아볼 것은 그 허전함 때문에 상대가 계속 나를 필요로 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때에는 그 사람을 이제 그만 도와야겠다고 서둘러 결론 내리기보다, 왜 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두려운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 같은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우들이 저를 신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늘 저를 찾아야만 제가 필요한 목사라고 느낀다면, 저 역시 그들의 의존에 기대어 제 가치를 확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우들이 말씀을 분별하고 서로 돌보며 믿음의 결정을 해 나가는 모습에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성도들의 믿음으로 위로를 받았듯, 저도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힘을 얻으며 함께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가 자주 의지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나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요즘 무엇 때문에 지쳐 있는지, 어떤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봅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의 이야기에 시간을 내고, 내 형편에서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일 한 가지를 실천해 봅시다. 내게 필요한 도움을 정직하게 말하면서, 그 사람의 필요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방식과 크기는 같지 않습니다. 형편과 건강에 따라 일방적으로 오랫동안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지우지 않고 함께 짐을 나누며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교회 재정을 위한 물질의 헌신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상대방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때만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만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돌보아 주는 그 사람도 돌봄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 필요를 정직하게 말하고 그 사람의 필요에도 응답하며, 각자의 형편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오늘 시편의 아이는 젖을 떼고도 어머니의 품에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리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 갑시다. 바울과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서로의 믿음을 통해 힘을 얻었듯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지우지 않고 함께 짐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세워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